하성란 소설집-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소설집-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순서
1. 별 모양의 얼룩
2.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3. 파리
4. 밤의 밀렵
5. 오, 아버지
6. 기쁘다 구주 오셨네
7. 와이셔츠
8. 저 푸른 초원 위에
9. 고요한 밤
10. 새끼손가락
11. 개망초
표제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여자가 혼수감으로 마련한 열두 자짜리 오동나무 장롱이 자신의 오동나무 관이 될 뻔한 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실패한 결혼과 오동나무 장롱의 연관성이다. 물론 여자가 결혼상대인 제이슨의 됨됨이보다 오동나무 장롱을 너무 믿은 것이 화근일 수 있다. 제이슨이 뉴질랜드 교포이고 부자이며 매너가 반듯하다는 것만으로 결혼을 서두른 것이라든지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를 덜기 위해 챙이 끼여드는 것을 허용한 것도 결혼에 대한 여자의 안이한 자세를 보여준다. 결혼을 그저 권태로운 삶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는다면 결혼은 어느새 오동나무 관처럼 단단한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작품에 합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작품의 수수께끼같은 면모를 실감하는 방식은 아니다.
이 단편의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제목인 듯하다. '블루비어드'(Bluebeard, 푸른수염)라는 프랑스 전래동화와 관련지어 읽을 때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새로운 층위의 의미를 획득한다. 품위와 예절과 부를 고루 갖춘 멋진 신사 블루비어드는 제이슨처럼 뭇 여자들에게 좋은 신랑감으로 알려져 여러 차례 결혼을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아내들은 연이어 죽는다.
블루비어드는 여행을 떠나면서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 성 안의 모든 방문들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넘겨주면서, 다른 모든 곳은 마음대로 돌아봐도 좋으나 일층 끝의 방만큼은 절대로 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다. 처음에 아내는 남편이 경고한 대로 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커지는 호기심을 어찌할 수 없어 자물쇠를 따고 그 방에 들어가는데, 벽에는 블루비어드의 전 부인들의 시체가 걸려 있는 것이다.
블루비어드의 엽기적인 행각이 드러날 때의 충격이 이 설화의 요체에 해당되겠지만, 정작 궁금한 것은 블루비어드의 '첫번째' 아내는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첫번째 아내도 블루비어드의 경고를 어기고 그 방에 들어갔다면 거기서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블루비어드의 설화 자체가 매우 풍부한 해석가능성을 지닌 이야기인데, 작가는 그 설화의 미완의 대목을 끌어들여 또 한편의 새로운 이야기를 짜낸다. 즉 블루비어드가 첫번째 아내에게 숨기려 한 비밀은 원래의 설화에서는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지만 하성란은 그 상상의 공간을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라는 자기 이야기로 채우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설화에 담긴 초사실적 활력을 작품 내부에 끌어들이는 한편 이 설화에 나름의 재해석을 가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이야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또 한편의 이야기를 만드는 '메타픽션'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소설 장르에서 상대적으로 억눌려왔던 설화적 상상력과 메타픽션의 계기들이 이 작품에서 은밀하게 다시 만나는 양상인 것이다. 서사양식에 대한 작가의 탐구심과 호기심이 반짝반짝 빛난다.
-한기욱의 해설 '정교한 언어, 다양한 양식들' 중에서-
단편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를 읽고 난 느낌은 좀 재미있군! 이었다. 그것은 동성애라는 약간은 진부한(?) 소재를 잘 짜여진 사건과 구성(미스터리와 컬트적인)으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해설을 읽고나니 그게 아니었다. 프랑스동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라니.... 그의 상상력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와 1999년 6월의 씨랜드 화재참사에서 소재를 따온 '별 모양의 얼룩'을 제외한 하성란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위와 같은 상상력이 돋보이는 것은 확실하나 이야기하려는 의도보다는 사건이 앞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미스터리와 환상, 컬트적인 방식은 '이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작가의 의도를 공고히 하는데 사용되지만 뒤집어 보면 주제에 작위적으로 맞추려드는 사건을 만드는데 더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잘 짜여진 작품마다에서 한번쯤 드러나는 이러한 작위성이 결론을 내지 않는 그의 소설방식에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이 그의 소설이 기이한 소재설정과 그로인한 사건이 주제를 억누르고 있다는 혐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하성란의 소설은 재미있다. 그것은 그가 즐겨 쓰는 미스터리와 추리기법같은 , 겉트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로 인해서일텐데, 거기에는 그리 평범하지 않는 소설적 소재와 공간(그는 주로 실종사건이나 유괴사건, 총기난사같은 주로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들을 많이 차용한다.), 그것을 풀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또한 한 몫을 함에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고나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리 가볍지 않음에 있다. 가볍기만 하다면 기대도 없기에...... 그러니 답 또한 거기에 있다. 그가 바라보는 문제의식은 그의 작품이 소재주의와 형식주의라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