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독서일기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빛의 염탐꾼 2008. 8. 24. 06:58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차례

 

시뮬라크르의 자전/역사:복고 시나리오/홀로코스트/차이나 신드룸/Apocalypse now(세계의 종말 지금)/보부르 효과:함열과 저지/거대시장과 파생상품/매체 속에서 의미의 함열/절대적 광고, 제로광고/동일증식 집단 이야기/입체 영상들/충돌/시뮬라크르들과 공상과학/동물들 영역과 변형들/나머지/나선형 시신/가치의 마지막 탱고/허무주의에 관하여

 

 

어려운 독서였다. 전복적인 사유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한편으론 '이건 아니지' 그렇게 이해하는 둥 마는둥 그렇게 읽고나니 남는 것이란 '현대의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무런 답을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앞선 사유는 위험하지만 즐겁다는 사실.....

이해되지 않는 단어를 따라가다가 그래도 가끔씩은 이해될 법한 문장들이 있어 그 부분을 옮겨본다.

 

<시뮬라크르들과 공상과학> 중에서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질서: 이미지, 모방, 위조 위에 세워지고 조화로우며 낙관주의자적이고, 신의 이미지에 따라 자연의 이상적인 회복과 그 이상적인 제도를 목표로 하는 자연적이고 자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

에너지와 힘 위에, 기계에 의한 물질화 위에, 그리고 모든 생산 시스템 속에 세워진 생산적이고 생산주의자들의 시뮬라크르들-끝없는 에너지의 해방과, 세계화 그리고 지속적인 팽창의 프로메테우스적인 목표(욕망은 이러한 질서의 시뮬라크르들에 상관적인 유토피아들 중의 일부이다),

정보, 모델, 정보통신학적 게임 위에 세워진 시뮬라시옹의 시뮬라크르들-완전한 조작성, 파생실재성, 완전한 통제 목표,

첫번째 질서에는 유토피아의 상상력이 대답한다. 두번째에는 그 본래 의미로의 공상과학이 상응한다. 아직도 이 세번째 질서에 대답할 어떤 상상이 있는가? 가능한 대답은, 공상-과학이라는 이 선량한 늙은이는 죽었고, 다른 무엇이 솟아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소설적인 것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이론에서도). 유동적이고 비한정적인 동일한 운명이 공상-과학에 종말을 가한다. 또한 특수한 장르로서의 공상-과학과, 이론에 있어서도,.....  (중략)...... 첫번째 질서에 상응하는 오페라적인 것 l'operatique(극장적이고 환상적인 기계류, 극장적인 위상과 기술의 <거대한 오페라>)가, 두번째 질서에 상응하는 수행적인 것(힘과 에너지의 산업적, 생산적, 효율적인 위상), 세번째 질서에 상응하는 조작적인 것(<상위기술적인> 것의 정보 통신학적이며, 언제 어찌 될 줄 모르고 부유하는 위상), 이들 사이의 간섭은 오늘날 여전히 공상과학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마지막 질서만이 여전히 진정 우리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나선형 시신> 중에서

 

대학은 가소성이다:문화적 실체도 지식의 목적성도 없으며 시장과고용이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기능적인 것도 아니다.

더 이상 고유한 의미도 권력조차도 없다. 권력도 가소성이다. 그 때문에 68년의 횃불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대학, 그리고(정치적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오염에 의하여, 단숨에 다른 모든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질서 속에서, 권력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의 문제제기가 다시 오기(혹은, 마찬가지지만, 그 둘의 공모를 밝히기)가 말이다. 왜 학자와 학생이 문제인가를 이 급작스런 선회는 드러내었다. 지식의 막다른 골목, 비-지식의 현기증은(다시 말해 지식의 질서 속에서 가치축적의 부조리와 불가능성) 권력 자체에 반대한 절대적인 무기로서, 권력을 똑같은 포기 시나리오에 따라 해체하기 위하여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68년 5월의 효과다. 그런데 지식 이후에 권력 그 자체도 멀리 달아나버린 오늘날, 권력은 포착 불가능이다. 스스로 포기되어 버렸다. 지식이라는 내용물도 없고, 권력이라는 구조도 없는, 차후로 부유하는 어떤 제도 속에서 (그렇지 않으면 어떤 옛날 식의 봉건제도 속에서, 즉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주재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도 마치 병영과 극장에서처럼 인위적인, 어떤 시뮬라크르적인 기계를 관리하는 옛날 식의 봉건제도 속에서), 어떤 공격적인 폭발은 불가능하다. 신음하는 지식과 권력게임의 우화적인, 시뮬라크르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부패를 더 급히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파업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파업은, 가능한 어떤 대학의 이상을, (발견될 수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의미도 없는) 어떤 문화로 전체의 접근이라는 허구를 다시 젊게 한다. 파업은 스스로를, 대학기능의 위기적인 대체물로서, 그의 치료제로서, 대학의 기능에 대체한다. 파업은 아직도 실체와 지식의 민주화를 꿈꾼다. 게다가 오늘날 어디서고 좌익은 이 역할을 담당한다. 썩어버린, 해체되는, 그의 모든 합법성의 의식을 상실한, 그래서 거의 스스로 기능하기를 포기한 기구속에다 좌익의 정의는 정의의 관념, 사회적인 논리와 도덕적 강요를 불어 넣는다. 좌익은 절망적으로 권력을 재생산하고 퍼뜨린다. 왜냐하면 좌익은 권력을 원한다. 따라서 좌익은 체제가 권력에 종말을 고한 그곳에서 권력을 믿고 권력을 부활시킨다. 체제는 모든 공리들 하나하나에, 모든 제도들 하나하나에 종말을 고하고, 좌익은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좌익의 모든 목적들을 하나하나 실현하면서, 자본의 모든 제도적 장치들을 어느 날 다시 재투자하기 위하여 모두 다시 부활시켜야 하는 진퇴유곡에 처함을 본다:사적 소유권으로부터 소기업에 이르기까지, 군대로부터 국가적인 위대성에 이르기까지, 정의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모든 달아나버린 것을 보전해야만 한다. 체제 자체가, 그 치열함 속에서 그러나 그 돌이킬 수 없는 함열 속에서 제거해 버린 모든 것을 보전해야만 한다.

그로부터 모든 정치분석용어의 역설적인 그러나 필연적인 전도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