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거리(可視距離)에 대하여
오늘 청계산을 오르는데 가시거리가 하도 좋길래 어느해인가에 써두었던 가시거리와 관련된 시의 초고가 생각났어요. 여섯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찾아보니 그게 2001년 1월 17일의 일이었나 봅니다. 제목이 가시거리와 관련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엉뚱하게도 '기록이 깨어지다'인 걸 보니 그날은 무척 추웠나 봅니다. 올해도 슬슬 걱정이 됩니다.
철원의 수은주가 기상관측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는/소식이 들리던 날/서울의 가시거리는 삼십팔킬로미터로 늘어나고/부산에서는 폭설이 내렸다/북한산에서 관악산이 훤히 보이고/아마 인천 앞바다도 보였겠지//추운 날일수록 멀리있는 풍경이 보인다/모든 계량기는 파손되었다 모든/변기는 얼어붙었다 모든/열망이 무너지던 그 때처럼 그렇게 순간이었다//오늘은/저 멀리 파란 하늘 아래 쌓여있는/산정의 눈이 보이고/눈 밑에서 겨울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것도/보일 듯 하다//희안한 일이다/눈앞이 캄캄한 날일수록 멀리 있는 것들이 보인다/손쉬운 예측을 기록하던 모든 계량이 파손되고/손쉬운 욕망을 배설하던 모든 출구가 막힌 날//기온도 잊고 계절도 모르고 살던/내 머리 속으로/봄이나 자유니 평등이니 평화니/하는 것들이 그리워지는 것은('기록이 깨어지다'초고, 2001, 1,17)
만약 우리의 인생에도 가시거리가 있다면..... 하고 가정 해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마디에서 앞을 쳐다보겠지요. 앞이 훤히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뿌연 안개에 가린 듯, 아니면 성에가 낀 듯,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몇 년 몇 월 며칠 퇴직을 하고, 몇 년 몇 월 무슨 무슨 병에 걸리고, 그것도 모자라 몇 날 몇 시, 죽음의 시점마저 훤히 꿰뚫어보는, 그렇게 인생의 가시거리가 길다면 좀 재미없는 인생이 될 듯도 합니다. 그 반대는 또 어떨까요. 당장 내일 내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언제나 비오는 날처럼, 아니면 안개가 자욱한 날처럼 가시거리 제로의 인생, 너무 피곤하고 사나울 듯도 합니다. 모든게 적당하면 좋겠지만 그 적당이란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또한 인생인 것 같습니다.
거대한 이념의 시대가 있었지요. 돌이켜보면 우습지만 앞이 너무나 잘 보인다고 했습니다. 저 산 너머에,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나라가 환하게 보인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우겼습니다. 알고보니 그게 아니였지요. 천국의 입장권을 받아놓았다고 노래하는 광신을 닮아 있었습니다. 어설픈 희망은, 설익은 대안은 보기좋게 끝을 보았습니다. 관념으로 가시거리를 늘렸던 신념의 말로은 그러했습니다. '노래가 제 스스로 깃발 펄럭여 만장에 박수갈채 날아오르던 열창의 시대(김정환의 시에서)'는 빨리 끝을 보는 것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어설픈 신념은 끝이 잘 보인다는 것을, 끝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더 참담한 것이라는 걸 느낀게 불행중 다행이었지요.
다시 겨울이야기를 해봅니다. 어제 대안학교에 배정된 국가지원금을 거부하자며 누군가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이 대안학교의 정신을 새롭게 세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아프게 아프게 그 지원금을 거부하자고 호소하는 글이였지요.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지나가며 예를 든 시민단체의 지원금에 대해서는 고개가 끄덕여졌지요. 의심스러운 지원금에 익숙해져버린 지금, 시민단체의 운동성이란게 그저 '길들여진 운동성'으로 떨어지고 '길들여진 운동성'이란게 '진정한 운동성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그의 고민속에 시민운동의 현재가 보입니다. 미디어법이다. 4대강 살리기다, 정부가, 아니 권력의 만행을 강건너 불구경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답답하여 감히 던져 봅니다.
겨울입니다. 설익은 희망도 어설픈 기대도 모두 떨어지고 맨몸으로 떠는 겨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앞이 잘 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청계산에서 남산은 물론이고 멀리 북한산 인수봉도 보였습니다. 내가 유독 겨울을 배경으로 한 시들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 절창의 시들이 왜 모두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지고 맑은 정신만이 남아 있는 겨울공화국에서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봉준이가 울(삼남에 내리는 눈, 황동규)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 봄입니다,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정신과 병동, 마종기)라는 미치광이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었겠지요.
이념의 발아와 이념의 홍수가 지나고 이념이 갈피를 잃어버리고 제 색깔을 잃어버린 혼돈같은 이념의 단풍기를 지나 이제는 이념이라고 치장한 것들은 모조리 떨어지고 없습니다. 아니 그게 내 희망사항 뿐일지라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보이는건 앙상한 가지 뿐입니다. 앙상한 가지의 떨림, 이것이 옛 어른들이 '지조'라고 부르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갑니다.
몇일전 친일인명사전에 1905년 황성신문 주필로 을사조약체결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라고 울부짖었던 장지연 선생이 포함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유명인 치고 친일에서 비껴가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인 세상인지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사실이라 좀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1914년부터 친일행각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의 변절(아니 그게 그의 이념이고 본래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이 참 빠르다는, 그가 내다보는 생의 가시거리가 참 짧다는 생각을 해 보았지요. 10년도 채 안되는 앞날을 내다보지 못했던 언론인,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바 있어 한순간에 애국자에서 친일파로 운명이 뒤바뀌었다는 사실과 그게 지금 한반도의 모습이고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수많은 친일인사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보니 단연 서정주 시인이 떠오릅니다. 시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친일의 과거, 그 양자 사이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달고사는 그, 기자가 그를 향해 왜 그런 시(황국신민을 주창하는)를 썼느냐고 물었을때 그는 그래도 조금 솔직했던가 봅니다. '일본인들이 무서웠다고, 제의를 거부하면 돌아오는 벌이 무서웠다고', 겁많은 어린아이처럼 왕방울만한 눈을 껌벅거리며 대답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대답이 솔직했든 어쨌든 간에 그가 지조없는 사람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한겨울에 오히려 시퍼렇게 살아나는 소나무나 대나무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 시대에 죽음으로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 이가 한사람이라도 있었기에 그의 행위는 옹호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의 시에서는 섣부른 달관이 보입니다. 설익은 해탈이 보입니다. 그의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명확해 집니다.
식민지 시대가 민족을 위한 저항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민주를 위한 저항의 시대인지 모릅니다. '민족'이 '민주'라는 개념의 아래에 놓일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민족'이란 개념은 '민주'를 위해 긍정적인 열활을 할 수도 있지만 부정적 역활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하기에 둘의 관계는 언제나 복잡합니다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서) 어쩌면 식민지의 지난 시대와 비교해볼 때 우리 시대는 민주를 위한 저항정신이 너무 약한 듯 합니다. 또한 민주를 위한 저항의 반대편(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식민지 시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편에서 활동하던 쪽, 지금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내리는 쪽을 향한 분노와 비교해 볼때)에 서있는 쪽에 대해 우리가 너무 관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너무 관대한 듯 합니다.
'절차상 위법이지만 무효는 아니다'라고 결정한 헌번재판소의 노법관들이나 4대강살리기에 대한 환경영향평가를 졸속으로 처리하는 평가단원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민주를 위한 저항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권력에 아첨하는 그들의 행위는 가까스로 싹을 튀우고 있는 민주를 밟아버리는 행위임에 명백합니다. 자주를 뿌리채 뽑아버리려는 친일과 같은 명백한 반역행위이지요. 단지 그 경계를 가르는 논리가 '민족'과 '민주'로 갈라진다는 것뿐.... 더욱이 민주는 민족보다 더 고귀한 존재임에 분명하기에 .....
100년 후엔, 아마도 그들 이름 하나하나가 친일인명사전과 비슷한 민주반역자인명사전에 오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소박한 꿈이지만 그리해야만 '역사'란 것이 존재할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땐 제발 변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자리가 탐났다, 자식 유학비를 댈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권력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일자리 창출'이니 '수돗물 확보'등 말도 안되는 변명은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건설업자들을 위하는, 잘사는 부자들을 위하는 권력자의 말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철학도 사상도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지조는 티끌만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나오면 좋겠습니다.
친일과 친권력은 쌍둥이처럼 하나입니다. 아니 민족을 반역한 친일보다 민주를 반역한 친권력이 더욱 파렴치한 행위일 것입니다. 보수도 진보도, 모든 사상도 지조로서 그 완성을 향해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을 향해가기 전의 모든 사상은 그저 거짓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 겨울입니다. 맑은 정신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발가벗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