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문학

(詩) 흘수선吃水線 앞에서 - 권혁웅

빛의 염탐꾼 2010. 4. 23. 13:57

오랜만에 시와 관련있는 책을 하나 빌렸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몇장 넘기다가 아래의 시를 만났습니다. 좋을 시를 보면 즐겁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질투가 납니다. 아직까지도 말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낯선 말에도 즐거움과 질투가 배여났으면 참 좋을텐데..... 

 

 광주 남종면. 사용 기종 : Canon 300D 사용 렌즈 : 시그마 18-125, 곰솔님

 

 

흘수선吃水線 앞에서  -  권혁웅



 

매어둔 뱃머리처럼 숙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어

생각이 많다는 건 ‘말 더듬을 흘吃’ 자처럼 입으로 구걸하는 것

너도 한 번 해 봐. 율문으로 부탁의 말을 적어봐

기도를 타고 올라오는 기도문들이 다 그렇지만

연통을 내기 위해 뜯어낸 방충망 자리처럼 머릿속이 깨끗해질 거야

아무래도 이번 삶은 버렸어 텅 비었어, 라고 말하며

소금물을 끼얹는 저 조석간만 앞에서

나는 얼굴로 수면을 문대며 왔어 여기가 애통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저 수위에는 내가 보탠 게 있어, 라고 대꾸하는 일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니, 이부자리가 그렇게 축축해서야 되겠어?

젓가락장단을 받아내느라 홈이 파인 탁자가

자기도 모르게 흘린 술을 아래로 떨구듯

우리의 배반이 낭자해지듯

설거지할 틈도 없이 행주 잡은 손이 휘휘 저으며

돌려세울 틈도 없이 그래, 출렁이며 더듬으며

너는 흘수선 밖으로 걸어간 거야


 

 

 

해설- 신형철

흘수선吃水線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배와 물이 접하는, 경계가 되는 선.” 그런데 저 단어에 ‘말 더듬을 흘吃’자가 끼어 있는 게 이상하네요. 그러나 이상한 것에서 시적인 것을 건져 올리는 것은 시인들의 특기. 배가 물 위에서 찰랑거릴 때 그 배는 어쩌면 말을 더듬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가 그대 위에서 찰랑거리며 말을 더듬을 때처럼? 다시 그러고 보니, ‘말 더듬을 흘吃’은 ‘입 구口’와 ‘빌 걸乞’의 결합. 그러니까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입으로 비는 것이군요. 내가 그대 앞에서 말을 더듬을 때 그건 내가 그대에게 빌고 싶은 게 있다는 것? 자, 이쯤 되면 시 한 편 써볼 만합니다. 찰랑거리면서 잉잉대는 연애시 한 편. 거기에다가, 찰랑거리면서 잉잉댈 때 썩 효과적인 황지우의 발성법을 가동시켜보면 어떨까. 자, 한번 써보세요. 위의 시보다 잘 쓰기 쉽지 않을 겁니다.

 

  


권혁웅 - 1967년 충주 출생.

199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시』현대문학 2009. 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