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의 4대고택
1월 1일 포항 형님집엘 갔다가 양동마을을 들렀다. 지난 추석 겉핥기식으로 돌아보았기에 이번엔 두루 두루 둘러보았다. 관가정으로 올라가는 길의 은행나무노거수
관가정에서 본 양동마을 전경
4대고택중 유일하게 주인이 거주하지 않아서 내부가 개방되는 관가정
조선 성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우재 손중돈(1463-1529)이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건물의 평면구조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되었다.
관가정에서 본 안강들판,
측면에서 본 관가정, 보물 제442호로 조선중기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81년 보수 때 주위에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었단다. 관가정 뒤뜰에서 본 관가정 내부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탐방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보물 제 412호인 향단, 주인이 살고 있어 내부관람을 허용되지 않고 있다.
지난 추석(9월 22일) 찍은 향단의 모습, 이 건물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사감사로 있을 때, 모친의 병간호를 하도록 중종이 지어준 집이다.
뒤에서 본 향단, 두 곳에 뜰을 두고 안채, 사랑채, 행랑채를 독특한 평면형태로 구성하였다. 원래 99칸이었다고 전하나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 현재 56칸이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마을 전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위치와 모습에서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조금 벗어나 면도 가지고 있으며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건물이다.
가을의 양동마을
가을의 양동마을, 추석때 찍은 것이다.
향단 담장
겨울의 양동마을 전경
겨울의 양동마을 전경
무첨당 가는길, 조금 올라가면 무첨당이 나온다.
무첨당 가는길에서 뒤돌아본 바깥의 양동마을, 서백당과 무첨당 등 오래된 고택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다시 이러한 마을길을 더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이길을 걸어보면 왜 양동마을의 고택들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길이 있기에 마을이 있을 것 같지.... 멀리서 보면 이 안에 마을이 있는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무첨당과 서백당이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과 6.25등 그 많은 동란이 이 건물을 비켜간 까닭도 어쩌면 이 때문이리라.....
무첨당에서 서백당으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서 본 안강들판
무첨당에서 서백당 가는길에 있는 경산서당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서백당, 중요민속자료 제 23호, 정원의 600년된 향나무가 이 건물의 나이를 대신 말해주고 있다.
600년된 향나무, MBC에서 한창 촬영중이었다. 구정때 방송된단다. 서백당은 월성 손씨 종택으로 손소(1433-1484)가 지은 것이다. 그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1463-1529)과 그의 외손자이자 동방오현의 하나인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백당, 혹은 송첨이라고도 불리운다. '-'자형의 대문채 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는데 대청 6칸, 안방 3칸, 부엌 2칸이다.
주인이 살고 있어 역시 출입금지, 살짝 어기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큰 가옥이며, 사랑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백당 사랑대청과 멀리 향나무
양동마을의 모든 집들(사람이 살고 있든 없든간에 불구하고)은 모두 초가로 복원하였다. 이 집은 그 중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는 집인 듯하다. 지붕만 초가로 바꾸었지 사방의 기둥과 집벽은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89년 내가 문학운동을 시작했던 그 때, 선배의 고향이 양동마을이라 한번 이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선배의 집이 스레트였는지 기와였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고 ..... 오늘 기억을 되살려 찾아 보았으나 그 때의 기억을 복원할 수가 없었다. 스레트지붕으로 대표되는 근현대유물이 민속마을로 바뀌는 과정에서 모두 초가나 기와로 탈바꿈되는 이 모습은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그 대표적인 것이 예천에 있는 삼강주막일 것이다- 스레트에서 초가로 탈바꿈되었다) 이러다간 60-70년대의 온전한 모습을 갖춘 제대로된 스레트지붕은 다 없어지는건 아닌지? 현대 양옥과 민속이라는 초가와 기와의 협공에 밀려서 말입니다.
보물 제 411호 무첨당의 안채
무첨당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였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의 종가 별채로 세운 건물이다. 왼쪽이 별채인 무첨당이고 오른쪽은 안채이다. 안채는 주인이 살고 있어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이 집은 상류층에 속해 있는 사랑채의 연장건물로 불천위 제사, 손님접대, 휴식, 책 읽기, 등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마을 서북쪽 산등성에 남향하여 있으며 우측에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튼ㅁ'자형 본채가 있고 그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무첨당 옆에 있는 대성헌, 영조 8년 1732년 이언적의 11세손인 이능손이 분가하면서 지은 건물인데 조선중기의 건물들이 즐비한 이 양동마을에 있는 관계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이를 헤아려 보니 278년이나 되었는데도 말이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