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시샘하는 시 2편
모든 것은 유행이 지나고나면 자신의 본모습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일까. 거의 몇 년 만에 읽어본 시들 중에서 시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완성도에 있어서 꽤 괜찮은 시들을 만난다. 하긴 현대시가 언제 유행을 탔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보면 그 한때, 소수의 독자층 또한 아래시가 말하는 '허튼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꽃가루의 효능은 사월 ...... 꽃가루의 효능은 허튼 꿈'으로 이어지는 독백이 처연하다 못해 아름답다. 오랜 꽃샘추위가 이어지는 오늘은 ...... 봄이 아무리 찰나의 허튼꿈에 불과할지라도 그리운걸 어쩌란 말인가?
尺牘揷入春書*
꽃가루의 효능은 사월
그 시기에 출시 된 허공은 무겁고 나무들의 몸 안으로 가려움이 옮겨 다닌다
나무들이 흔들려 허공을 긁고 있다
시원해지는 바람.
담장 안으로 꽃잎 지는 소리가 뛰어 든다
걸음이 없는 것들에게
봄 한철이 줄지어 방문한다
잠자던 바람이 일어나는데 봄은 아주 우연한 계절이다
한 철 분주한 허공의 편도
멋모르고 뿌리 내린 것들은 멋모르고 기다리는 일 뿐
오다가다 허공에서 만난 사이
토닥토닥 봄날을 단장 해 본들
咯血의 자리에는 늘 咯血이 피는 일
꽃들은 늙어서 허공을 살짝 밟아가고 떨어지는 것들은 제 스스로의 목이 시들었기 때문이다
「尺牘- 수두 꽃이 시들어간다고 하나 실은 얼굴이 앞서 시드는 것을 그대도 아는 일. 비벼대는 일이 없으면 꽃의 粉 또한 기침이나 불러 들여 만발할 것을. 手應手答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일. 意思없이 열리는 마음에 봄날은 그花奢를 뽐낼 뿐이지. 그대를 만나고 수없이 뒤척였으나 깨어나지 않는 잠도 있다는 것을 봄날 꾸벅꾸벅 졸면서 깨닫는다. 그대 봄은 너무 노련해져 향기가 없으니 속히 알아채길.」
무분별 암호들이 적힌 春書는 다 읽을 시기가 있는 법, 때를 놓치면 번져 흐릿해진 문장들이 뚝뚝 지고 만다.
담 너머로 날리는 흰 얼굴이 목 빼어 훔쳐본다
꽃가루의 효능은 허튼 꿈.
*척독삽입춘서(尺牘揷入春書) 암호로 씌여진 짧은 쪽지가 첨부된 봄 편지.
해설 이혜원
모든 편지에는 '정 情'이 깃들지만 봄 편지에서 그것은 유난하다. '춘정 春情'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봄의 정취는 유별나다. 사람들만 그러한 것도 아니다. 봄이면 만물이 발정한 것처럼 가렵고 설렌다. 봄날은 또한 덧없이 빨라 한철 분주하다 어느덧 사그라진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자연의 풍광만을 그리며 변죽을 두드리던 봄 편지의 허리춤에 끼어 있는 척독. 꽁꽁 숨겨놓은 남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재미가 이러할 것이다. 꽃보다도 더 빨리 시드는 인생이거늘 짐짓 시치미 떼며 무심을 가장하는 상대방을 점잖게 원망하는 심사가 흥미롭다. 봄날도 그렇지만 춘정을 아로새긴 춘서 春書의 시효는 지극히 짧다. 꽃보다 더 먼저 낙백한 문장의 뒷모습이 소슬하다.
박해람/1968년 강원 강릉 출생. 1998년『문학사상』등단.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쌩, 쌩, 그대의 말에 찬바람이 불었다
꿈같은 청춘의 세월도 지워버려 겉만 화려한 속이 빈 꽃
봉우리, 갈이 할 털도 잎도 없이 성급하게 봄을 노래한 내
죄 크다 볼은 차고 눈시울이 붉네 겉과 속이 따로 노는 태
양은, 시간은 참 음흉해라 그 기온차에 속아 내 가슴엔 온
통 뿌연 성에, 지친 사랑에 간지러운 속삭임에 깜빡 넘어
갔구나
잠 덜 깬 청개구리 어리둥절한 눈매 위로, 모진 목숨 위로
불어라 순진한 사랑을 날려버리듯 바람아 꽃샘바람
(꽃을 시샘하다, 황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