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고 하자(민구) 미안의 제국(김승일)-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시
멀리 떠 있는 뜬구름같은 현대시, 풍부한 상상력과 강한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깊이가 놀라우면서도 낯설다.. 그 중 나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시들을 기록해둔다... 잊어버리기 전에.....
가을이라고 하자 / 민 구
그는 성벽을 뛰어넘어 공주의
복사꽃 치마를 벗긴 전공으로
계곡타임즈 1면에 대서특필됐다
도화국 왕은 그녀를 밖으로 내쫓고
문을 내걸었다 지나가던 삼신할미가
밭에 고추를 매달아놓으니
저 복숭아는 그럼 누구의 아이냐?
옥수수들이 수군대는 거였다
어제는 감나무 은행이 털렸다
목격자인 도랑의 증언에 의하면
어제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라는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냐며, 조사 나온 잠자리에게 도리어
씩씩대는 거였다
룸살롱의 장미가 봤다고 하고
꼿꼿하게 고개 든 벼를 노려봤다던,
대장간의 도끼가 당장 겨뤄보고 싶다는,
이 사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버스 오기 전에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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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구 / 1983년 인천 출생. 2009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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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자주 보인다는 지적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동화’란 대개 현실의 부조리를 확대해서 보여주기 위한 볼록렌즈로 채택된 ‘잔혹동화’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이 시는 천진무구하고 익살스러운, ‘잔혹’이 없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다른 시인들의 볼록렌즈를 눈 부릅뜨고 함께 들여다보느라 다소 피로해진 눈이 시원해지는군요.
그러나 ‘동화적’이라고 해서 이 상상력이 상투적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도대체 ‘가을’을, 강의 공주와 염문을 피우고, 은행을 털고, 룸살롱을 출입하고, 싸움질깨나 하는 그런 난봉꾼에 비긴 것은 얼마나 신선한 상상력입니까. “몽타주를 그려야 하는데” 한 줄 띄고 이 마지막 구절을 적은 것도 참 잘한 일. 신형철 〈문학평론가〉
미안의 제국 / 김승일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래. 아버지 나 죽는 거야? 왕자가 울었다. 짐이 미안하구나.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지. 화가 난 짐을 향해 무릎을 꿇어.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지. 짐이 먼저 서러웠는데.
왕이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는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계란 냄새가 나죠?
화가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개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온다면. 어쩐지 미안할 거야.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겠어요.
마음껏 계획하렴. 허리를 편 내시처럼.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란다.
일어서시오. 그들은 헤맑게 상투를 감는다. 신臣들은 오뚝이 같군. 무릎은 까졌지만 멀쩡합니다. 물러들 가라.
짐은 폭군처럼 피곤하구나.
신臣들의 불찰입니다. 헐레벌떡 그들은 망건을 풀고. 천진하게 무릎을 꿇지. 폐하 통촉하세요. 바지가 점점 짧아집니다.
짐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하구나. 아버지는 겁쟁이에요. 짐이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아빠가 너를 낳았지. 필요하니까
너도 애를 낳으렴. 깨끗한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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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 1987년 경기도 과천 출생, 2010년 <현대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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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은 가족공동체 내부에서만 감지되는 미묘한 정서를 '아이들'의 시각에서 포착해낼 때 특히 성공적인 결과에 도달하고는 했다. 이번 시는 '가족심리사극'이고 소재는 '사과'다. 왕은 세자에게,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인데, 신하들의 사과를 받는 게 미안하고 그 미안함이 억울해서, 그러니까 자신도 "사과하고 싶어서" 너를 낳았다,라는 기묘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덧붙인다. 사과를 하고 싶으면, "너도 애를 낳으렴."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인가.
'사과하는 사람'과 '사과 받는 사람' 중에서 심리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후자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 시는 그 통념을 엎어버린다. 때로는 사과를 받는 사람이 더 미안해질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럴 경우 사과를 하는 쪽이 권력관계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요컨데 '사과의 정치학'이라고 할까.
이것은 날카로운 통찰이다. 부모의 사과를 받을 때 우리 자식들의 심리적 정황이 어땠는지 돌이켜보라. 권력관계의 우위에 서고 싶으면 애를 낳아서 그에게 사과를 하라는 이 시의 지령은 그래서 통렬하다. 이 시가 현대 가족이 아니라 왕조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 사과의 정치학을 더 선명하게 구현하기 위해서였겠지. 내 기억으로는 이런 테마를 한국시에서 본 것은 처음인 듯싶다. 특유의 '우울하게 껄렁한'화법도 매력적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