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거미, 베를 짜다 - 손수진
거미, 베를 짜다
- 손수진 -
오래된 집에 거미가 산다
그 집의 역사만큼 오래된 거미 밤마다 실을 뽑아 베틀에 건다
나고야에서 나고 자랐니라
해방이 되자 너도 나도 귀국길에 올랐니라
사나흘이면 가리라던 귀국길은 달포가 넘어 걸렸니라
시모노새끼에서 규슈로 가는 야미 배를 타고
동지섣달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까불까불 가랑잎 같았니라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바닥에 짐짝처럼 구겨져 있었니라
산후조리 못해 병든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하고
핏덩이 동생은 내가 들쳐 업고, 애면글면 군산항에 내렸는데
쓰리꾼이 아버지 허리춤에 찬 전대 귀신같이 털어가고
지게꾼에게 매낀 보따리마저 잃어버리고
석탄차 얻어 타고 대구에 내리니 염생이 마냥 눈알만 반들반들
그런 우스운 꼴이 없었니라
고향집에 돌아와 열흘 만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닷새 후에 딱정벌레처럼 붙이고 다니던 동생마저 세상 뜨고
그때 나이 열일곱,
열아홉에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예단이라고 벌거지 터진 물들인 것 같은 명주베 넉자, 뿔스무리한 저고릿감 넉자
일곱세 무명베 두루마기 흑감 한 감, 동동구리무 한 통, 덧분 한 통
시집오는 날 아침까지 손수 밥해먹고
분 한번 못 찍어 바르고 얼굴 한번 못 본 신랑한테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길쌈도 못 배우고 말도 어눌하고 홀아부지와 살다가 시집이라고 왔는데
대추씨 같은 시엄시 땡감 같은 시누이 내 살아온 역사를 어예 말로 다하겠노
어머니 나이 팔십, 지금도 그 주소를 외우며
밤새워 술술 몸속에서 거미줄을 뽑아 달빛아래 철커덕 철커덕 은빛 베를 짠다.
아이지깽 도요하시시 하시라쬬 도고 산주 이찌노 니반찌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봄호
※ 지난달 고향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하는일이 학생들 데리고 역사현장이나 남북접경지역 들을 둘러보는 것이다 보니, 'DMZ'를 주제로 한 얇은 자료집을 하나 만들었지요. 그걸 친구한테 줄려고 한권 들고 나가는데 어머님이 뭐냐고 묻습니다. 내가 만든 책이라고 했더니 '자신(어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지 뭣하러 그런걸 만드느냐'고 불쑥 한마디 합니다..... 그 말에 대꾸하다보면 '내 살아온 이야기 다 하자면 소설 10권도 모자란다'는 둥 '웬만한 대하소설 저리가라'라는 둥 끝이 안보일 것 같아... 무심히 나와 버렸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어찌 소설 10권과 대하소설에 비기겠습니까, 그러기에 한국현대사의 수난은 곧 여성의 수난사라고들 하지요....
"껴"와 "니라"로 대변되는 안동사투리의 질박한 어조사가 거의 눈가로 나오려던 눈물을 붙잡습니다. 그 어조사들이 눈물마저 사치스러웠던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 하여 뇌리에서 떠나질 않네요. 자신의 가족사(어머니에 대한)가 아니면 절대 나올수 없는 사실주의의 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소재의 빈곤'이니 "감수성의 변화'니 하는 핑계를 대며 이리 꼬고 저리 비틀어 눈물을 강요하는 현대판 신파극이 이런 작품 앞에서는 슬그머니 그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겠지요.... (황완규)
'거미'는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거미를 소재로한 다른 시를 읽어보시려면 여기를 눌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