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pecial Report | 북한의 백두대간 산들을 공개하다
잊혀졌던 북한의 산들
산신이 이끈 산행, 북대봉
글 사진 | 로저 셰퍼드(탐험·저술가) 번역 | 한영환

신비하고 독특한 산줄기로 백두산과 지리산을 굳건히 연결하고 있는 거대한 백두대간은 나에게 많은 흥분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지도를 보면 여러 산의 이름들이 점재해 있는데, 그 이름들은 마치 바위에 새겨진 글씨처럼 한국인의 시적 정체성을 나타낸다. 북한에서 진행한 내 작업의 일부는 산이 한국인에게 끼친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찾는 것이었다. 백두대간은 이를 위한 내 주된 과제였다.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매우 다르기에 나의 이런 탐구는 남북한이 하나였을 때의 역사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평양에서 동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평안남도 희창이라는 작은 읍에 머물렀다. 원래는 10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백산(1449m)에 갈 예정이었다. 이 산은 함경남도 금야강의 서쪽에 뻗은 백두대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신산경표>에서 특정한 산을 지적하면 인솔자들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개 이른 새벽에 자동차를 타고 북한의 시골을 달렸는데 변함없이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맑고 깨끗한 냇물을 따라 포장되지 않은 산기슭을 한참 달리니 작은 농촌 마을이 나타났다. 10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라 날씨가 좋았다. 가을의 따가운 햇살 탓에 흡사 마을의 똥개털처럼 강산은 건조했다. 우리가 탄 도요타 자동차는 검문소에서 이따금씩 멈췄다. 그러고는 군인들에게 증명서를 보여줬다.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점점 더 산에 접근했다. 정확한 지도가 없었기에 나는 마치 길을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게 방향을 모르고 다니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문득 내가 남한의 어느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얼마나 즐겼는가를 떠올렸다. 몇 주일 동안 남한의 미로 같은 산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고, 책무도 망각한 채 이 절에서 저 절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더 없는 행복을 느꼈던 때를 생각했다.
북대봉과의 운명 같은 인연
신양이라는 작은 읍을 통과하자 나는 우리가 이미 남강지맥을 횡단해 백두대간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거기서 느닷없이 북대봉(1326m)의 진입로를 만났다. 위치를 보니 백두대간을 벗어나 있었다. 산 입구는 커다란 시멘트 간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선명한 색으로 산길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세워 그 간판을 보고, 예정에는 없지만 이 산에 올라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먼저 갖고 있는 다른 지도들을 조사했다. 내가 갖고 있는 한 지도는 아주 자세하지는 않아도 도로가 제법 잘 표시되어 있었고 정보도 한글과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서울의 ‘중앙지도사’라는 곳에서 산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좋은 북한 지도를 달라고 했더니 1992년에 제작한 62만분의 1 지도를 두 장 주었다. 내가 그 지도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자 점원들은 감격하면서도 나의 야심찬 북한산행을 우려하는 얼굴을 보였다.
우리는 한문으로 표시된 도로 지도를 땅에 펴놓고 거리를 계산했다. 조용한 시골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더니 아기를 등에 업은 젊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가고 있었고, 뒤에는 나무지팡이를 움켜쥔 한 늙은 농부가 염소떼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강둑을 건넜다. 강둑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넘어진 발레리나처럼 쓰러져 있었다.
우리가 탄 자동차는 그들이 건넌 강둑을 넘어 북대봉으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작은 목조사무실을 지나자 이 지역의 입구로 보이는 문이 나타났다. 자동차는 이 열려 있는 문을 정차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그 후 꼬불꼬불한 산길을 약 1킬로미터쯤 올라가니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두 젊은 병사가 작은 야영지를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하고 북대봉의 볼거리들을 향해 걸어 올랐다. 길은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한 장소에 닿았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 게릴라전투를 벌인 김일성의 비밀기지 중 하나였다는데 여러 명의 젊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항일 게릴라들이 백두대간과 그 정맥들을 이용했다고 한다.

북대봉에서 만난 그녀
얼마 후 우리는 하산했다. 내려가는 도중 거의 달리듯이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올라오는 한 젊은 여군과 만났다. 열심히 걸어서 그런지 그녀의 볼이 홍조를 띠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미소 짓는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들어오면서 차를 세우지 않고 통과한 문에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 만약 우리가 차를 세우고 이야기했다면 그녀는 우리의 안내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의 하산길에 동행하며 우리가 차를 세워둔 지역에 관해 추가설명을 했다. 순간 해가 따뜻하게 비췄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황록색 군복은 한국전 당시 중공군이 입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쓰고 있는 모자에 달린 붉은 별은 공산주의를 나타내고 있었으나 그녀의 붉은 볼과 잘 어울렸다. 그녀는 문득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고, 우리는 모두 나무에 걸터앉아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혁명가 같았다. 그녀는 산 계곡에 갑자기 나타난 오페라 가수처럼 멋지게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차 안의 자리가 비좁았기에 여군 안내원이 거의 내 무릎에 앉은 듯 되었다. 내가 농담으로, 남자 동료와 밀착되는 것보다 그녀와 붙어 있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고 말했더니 모두 웃었다. 자동차가 사무실에 이르고 그녀는 내렸다. 사무실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연장자인 한 장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우리가 이 산에 들어올 때 자동차를 세우지 않고 그대로 문을 통과한 것을 따지는 듯했다. 차를 멈추고 우리의 신분을 밝혔어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야기는 잘 풀렸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는 화해와 사과의 의미로 악수를 나눴다. 문득, 내가 그 여군 안내원에게 “나와 결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붉은 얼굴을 더욱 붉혔다.

산과 사람, 그 순수한 인연에 대하여
원래의 목적지인 백산을 향해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며 나는 그 예쁜 여군이 자꾸 생각나 미소 지었다. 일전에 나는 인솔자 황성철씨에게 내가 북한에서 그 지역의 여성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차에 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질문을 농담조로 통역했고 사람들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괜찮다고 했다. 여성들도 재미있어 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 여성들의 한국적 모습이 좋다”고 덧붙였다. 황성철씨가 재차 통역하니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는 “당신은 남조선의 김삿갓이니 여기서도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지내라”고 말했다. 산을 다니다 보면 아름다운 경치도 좋지만 그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 사람과 만나며 쌓는 순수한 우정이다. 아마도 나는 북한의 산을 돌아다니며 하늘이 허락한 여러 인연들과 만나 새로운 우정을 맺을 것이다. 강산의 중립성은 우리 모두를 그렇게 단순하고 투명하게 만든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나는 이날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앞으로의 내 삶과 계획에서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 생각했다. 나는 남북한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차이들이 어떤 형태의 공통점으로 나아가고, 이후 그 모든 것이 소통의 감각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백두대간의 지혜가 그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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