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민족

북한의 백두대간 산들을 공개하다 2

빛의 염탐꾼 2012. 7. 20. 22:26

 

 

잊혀졌던 북한의 산들

2011년 북한 원정의 마지막 산, 문필봉

글 사진 | 로저 셰퍼드(탐험·저술가)  번역 | 한영환

 

 

2011년 10월 29일은 북한에서 13일 동안 진행했던 산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북한에 오기 전 서울에서 나의 이번 원정에 대해 가졌던 우려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런 걱정은 산바람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평안남도 맹산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다. 바로 전날에는 백두대간의 건너편인 함경남도 요덕군 중흥리의 철옹산(1093m) 고원지역에 갔었다. 철옹산의 고원은 작지만 인상적이었다. 그곳은 강원도 새포에 이어 나의 이번 북한 산행 중 오른 두 번째 고원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려는 ‘문필봉’은 표고 672미터의 비교적 낮은 산이었다. 문필봉은 정확히 백두대간에 위치하지 않고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산은 붓처럼 뾰족한 봉으로, 마탄강이 내려다보인다. 마탄강은 문필봉의 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대동강과 합류한다.

문필봉은 철옹산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북한에 오기 전 서울에서 신산경표를 보고 문필봉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 봉우리가 독특한 전망을 제공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글 쓰는 붓’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에 흥미를 끌었다(역주: ‘문필봉’이라는 이름은 계룡산 등 남한의 여러 산에도 있다).  

 

 

쉽게 길을 내주지 않던 문필봉 산정

철옹산에 갔던 팀원들 모두 문필봉에 갔다. 맹산에서 온 이형선씨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했지만 새로운 현지 안내자 임희철씨가 추가로 합류했다. 임씨는 근처 마을에서 임업에 종사한다. 황성철씨와 황철영씨를 합쳐 모두 다섯 명이었다. 우리는 문필봉의 북쪽에서 접근했다. 뒤편에 대동강 쪽으로 흐르는 마탄강물이 아주 맑아 보였다. 늦은 가을, 머리 위 구름 사이로는 햇살이 비쳤고 산들바람이 곧 비를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주며 불었다. 논밭은 수확을 한 뒤였고 산기슭도 벌거벗어 주위는 온통 누런빛으로 메마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흙길에 자동차를 세웠다. 길은 황량한 산속으로 꼬불꼬불 굽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나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우리의 문필봉 등산은 이전의 등산과는 달리 산길에서 시작했다. 이 길은 주민들이 산기슭의 옥수수 밭에 갈 때 이용하는 길이다. 사람들이 산길로 잘 다니는지 달구지 자국이 많았다. 벽지의 이 산에 오기 위해 들인 노력에 비해 비교적 쉬운 길을 걸어 올라가려니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나 북한의 산을 오를 때의 문제는 정상으로 가는 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주민들에게 정상에 올라갈 목적이나 이유, 흥미가 없어서다. 이런 산길은 경작지가 없는 곳에서 끝이 나기에 옆으로 돌아서 다른 쪽 마을로 내려가곤 한다.

편안하게 걷는 길이 갑자기 끝나고 가파른 사면에 맞닥뜨려 힘들게 올라가야 했다. 덤불과 낮은 관목들이 있어 그것들을 뚫고 올라가야 했다. 나, 이씨, 임씨 세 사람이 앞서 올라갔고, 그 뒤를 황씨 두 사람이 따라 올랐다. 얼마 뒤 우리는 등로를 막는 위협적인 벼랑을 피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우회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지 의심했다. 돌아서 갔더니 또 다른 벼랑이 나타났다. 문득, 전날 철옹산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딜레마에 다시 직면한 듯했다.

철옹산에서 우리는 단단하지 않은 수직 암벽 두 피치를 로프 없이 올라가야 했다. 나는 여행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말이다. 철옹산에서 맞닥뜨린 암벽과 달리 이번 벼랑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자신을 갖고 다가갔다. 좁은 침니가 보였다. 올라갈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 보니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기에 중심을 잃을까 불안했다. 겁을 먹자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이 침니로 올라갈 수 없어 보이자 이씨와 임씨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다른 곳에 가서 여러 번 오르기를 시도했다. 아주 높은 암벽은 아니었지만 카메라 때문인지 나는 이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불안정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혹시나 재수 없이 이 산에서 추락해 바보처럼 죽거나 적어도 중상을 입지 않을까 나는 몇 번이고 걱정했다. 만약 중상을 당한다면 현지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치료비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난처하지만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철옹산에서 그랬듯이 미끄러운 벽면을 오르면서 내 카메라 배낭을 팔을 뻗어 앞에 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몸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약간 두꺼운 마른 풀단과 손가락 굵기의 단단한 관목줄기를 움켜잡았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올라가기가 쉬워졌으며 튼튼한 나무들이 나타나 잡기 쉬웠다. 이씨와 임씨가 먼저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위에서 즐거운 농담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이었다. 팔뚝 굵기의 나무줄기를 붙잡고 끌어당겨 돌출부 꼭대기에 올라섰다. 바로 그 자리에 놀랍고 기쁘게도 황성철씨와 황철영씨가 서 있었다. 그들은 환히 미소 띤 표정을 짓다가 마구 웃어댔다. 나를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들 올라온 거요?” 내가 물었다. 대답 대신 그들은 계속 크게 웃어댔다. 이씨와 임씨는 두 황씨가 용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이 상황을 재미있게 여기자 그들도 기분을 풀고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순간들은 우리 사이를 더 끈끈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문필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산하

두 황씨는 여전히 자신들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 모두 정상 쪽으로 걸어갔다. 주변은 누런 가을 숲이었지만 꼭대기에는 작은 화강암 덩어리가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문필봉의 정상에 올라섰다. 바위 위에는 여러 사람이 편안히 앉아 있을 자리가 없었다. 북한사람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 아래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편 나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위 위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촬영을 했다. 남쪽 가까이에 백두대간과 철옹산이 보였다. 백두대간 동쪽에는 해발 600미터의 고원이 있고, 그곳에 ‘중흥리’라는 작은 농촌이 있다. 나는 중흥리와 같은 표고의 문필봉에 서서 마탄강을 내려다보면서 백두대간의 지형을 음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문필봉 정상에서 30분 정도의 시간을 보낸 뒤 하산했다. 오를 때와 같은 길로 내려갔지만 걸음을 난처하게 만드는 가파른 절벽만은 피했다. 덤불에서 벗어나자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산길이 나타났다. 북한인 팀원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이번 북한 산행 전반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했다. 북한에 오기 전 다소 불안함도 느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사라졌다. 이번에 가 본 북한의 산들은 서울에서 지도를 보고 선정한 것이라서 지역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산행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금강산을 제외하고는 모든 산이 아주 먼 곳에 위치해 자동차로 여러 시간을 가야했다. 북한 동료들이 열심히 함께 동반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속으로 감사했다.

자동차로 돌아와서 운전기사 한명수씨와 만났다. 그는 그동안 차를 정비하고 세차를 해뒀다. 그는 늘 그렇듯이 우리가 산에서 겪은 바보 같은 사건과 스릴 넘치는 모험담을 듣고 즐거워했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회전해 수확을 끝낸 옥수수 밭 사이를 지나 마탄강 강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늘 그렇듯이 밥, 김치, 불고기였다. 맛좋은 평양소주와 대동강맥주로 목을 축였다. 우리가 평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피크닉이었다.

나는 주위 경관을 살폈다. 북쪽으로 마탄강 건너편에 보이는 암벽은 소기래봉(961m)의 산자락이었다. 이 산은 더운지맥에서 남쪽으로 뻗은 곳에 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과 대동강 사이를 지나는 주능선이었다. 동남쪽으로 문필봉이 있고 그 너머로 백두대간이 높이 뻗어 있었다. 마탄강은 나의 왼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섯 명의 일행 중 세 명은 16일 동안 나의 모든 일정에 동행했다. 그중 13일 동안은 세 개 도에 있는 백두대간의 열 개의 산에 갔다. 피곤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의 깊어진 우정이 이를 증명했다. 우리는 전보다 더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단순한 인적사항을 넘어 모험과 산행을 통해 얻은 이야기 말이다.

백두대간의 산에는 정치적 차이가 없다. 동질성이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백두대간은 결코 분단되지 않았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