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와 희망, 그리고 아웃사이더
오늘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지요. 봄꽃이 한꺼번에 피어나듯 어제만해도 온갖 SNS에 봄노래가 호들갑스럽게 피어났었는데 그 노래들이 오늘 아침부로 다시 쑥 들어간 것 같습니다. 꽃샘추위 아니 꽃샘바람,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라지요. 이 '꽃샘'은 그 어감과 정서가 주는 미묘함과 아이러니로 인해 설익은 나의 시적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시계산업이 발달한 이유가 알프스산맥에 갇힌 아녀자들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손재주를 발휘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추위를 견디며 봄을 기다라는 , 그렇게 세계의 시간을 지배하는 스위스의 시계산업은 절망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탄생되었다고 보면 되겠지요.
겨울과 봄, 절망과 희망, 그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러고보니 계절과 관련되어 '꽃샘추위'란 말은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신록샘바람', '단풍샘더위', '눈샘비(바람)'(저의 어희력의 한계를 용서하길!)같은 단어는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지요. 그만큼 겨울과 봄, 추위와 따뜻함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그건 어쩌면 절망에서 희망을 노래하고픈 우리삶의 바램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겨울나무에게서 봄나무에게로'란 시도 있고 '겨울공화국'을 비롯한 온갖 겨울노래들과 봄의 아이러니를 노래한 '서풍부', '황무지'까지..... 하여간 엄혹함 속에서의 지조를 노래하는 겨울노래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노래하는 봄노래들은 많이 있지만 여름과 가을노래들은 그만큼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네 일상적 삶이 겨울과 봄, 추위와 따뜻함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면될까요.
아니지요, 봄과 겨울 사이에는, 따뜻함과 추위 사이에는, 그리고 희망과 절망 사이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고 있지 않을까요. 봄과 겨울 사이에 다양한 계절이, 희망과 절망사이에 다종다양한 삶의 양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양극의 이분법으로 가르고 있지 않을까요.
'꽃샘추위'라는 단어 속에는 겨울에서 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길목만을 찬양하는 우리삶의 독선적인 시각이 깔려있다고 본다면 확대해석일까요. 어쩌면 우리네 삶 속에는 절망에서 희망만이 아닌, 희망에서 절망을, 아니 그 사이의 숱한 삶의 양태들이 끊임없이 한 데 들끓고 있을테니까요. 삶은 그렇게 일방적인 '꽃샘추위'의 세계가 아닌 '신록샘바람', '단풍샘더위', '눈샘비(바람)'이 한 데 섞인 계절 속에 놓여있으니까요. 조울증환자처럼 말입니다.
* 오늘 저녁의 두서없는 단상입니다. 이 고민이 쭉 이어가며 살을 붙여갈지 아니면 옆 길로 샐 지 그도저도 아니고 산으로 올라갈지는 나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