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문학
[스크랩] 미안의 제국 - 김승일
빛의 염탐꾼
2014. 5. 7. 22:00
후대의 가족을 구성하지 못한 나에게 있어 가족이 국가,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부쩍 고민하게 만드는 요즘이다. 아래 시가 그에 대한 어떤 답을 내려주지는 못하지만 위트와 재치 가득한 시어(물론, 좀 어렵지만)로 기존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가족의 의미를 살짝 비틀며 기존의 관념 안에 스스로를 안주시키는 우리의 위선을 살짝 꼬집고 있는 듯도 하다. 이 권력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혼외자'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하면 모든 국민들이 지금의 권력에 가지는 모든 의혹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이 사건을 시작했으리라...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능'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라는 것은 오랜 인류의 역사가 대신 말해주고 있거니와, 그건 지금도 유효한 것이기에.... 요즘은 부쩍 효율성과 편리성으로 대변되는 국가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머리를 어지럽힌다(물론 언제나 그랬지만)..... 세계테마기행에서 내가 좋아하는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가 소개되더니 한국기행에서 '섬진강'과 '김용택'시인의 이름이 나온다. 낡은 것은 참 오래도 가는구나.... 고민은 여기서 그만, 누워야겠다.
미안의 제국 / 김승일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래. 아버지 나 죽는 거야? 왕자가 울었다. 짐이 미안하구나.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지. 화가 난 짐을 향해 무릎을 꿇어.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지. 짐이 먼저 서러웠는데.
왕이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는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계란 냄새가 나죠?
화가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개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온다면. 어쩐지 미안할 거야.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겠어요.
마음껏 계획하렴. 허리를 편 내시처럼.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란다.
일어서시오. 그들은 헤맑게 상투를 감는다. 신臣들은 오뚝이 같군. 무릎은 까졌지만 멀쩡합니다. 물러들 가라.
짐은 폭군처럼 피곤하구나.
신臣들의 불찰입니다. 헐레벌떡 그들은 망건을 풀고. 천진하게 무릎을 꿇지. 폐하 통촉하세요. 바지가 점점 짧아집니다.
짐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하구나. 아버지는 겁쟁이에요. 짐이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아빠가 너를 낳았지. 필요하니까
너도 애를 낳으렴. 깨끗한 무릎을.
————
김승일 / 1987년 경기도 과천 출생, 2010년 <현대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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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은 가족공동체 내부에서만 감지되는 미묘한 정서를 '아이들'의 시각에서 포착해낼 때 특히 성공적인 결과에 도달하고는 했다. 이번 시는 '가족심리사극'이고 소재는 '사과'다. 왕은 세자에게,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인데, 신하들의 사과를 받는 게 미안하고 그 미안함이 억울해서, 그러니까 자신도 "사과하고 싶어서" 너를 낳았다,라는 기묘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덧붙인다. 사과를 하고 싶으면, "너도 애를 낳으렴."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인가.
'사과하는 사람'과 '사과 받는 사람' 중에서 심리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후자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 시는 그 통념을 엎어버린다. 때로는 사과를 받는 사람이 더 미안해질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럴 경우 사과를 하는 쪽이 권력관계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요컨데 '사과의 정치학'이라고 할까.
이것은 날카로운 통찰이다. 부모의 사과를 받을 때 우리 자식들의 심리적 정황이 어땠는지 돌이켜보라. 권력관계의 우위에 서고 싶으면 애를 낳아서 그에게 사과를 하라는 이 시의 지령은 그래서 통렬하다. 이 시가 현대 가족이 아니라 왕조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 사과의 정치학을 더 선명하게 구현하기 위해서였겠지. 내 기억으로는 이런 테마를 한국시에서 본 것은 처음인 듯싶다. 특유의 '우울하게 껄렁한'화법도 매력적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미안의 제국 / 김승일
솔잎이 연두색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래. 아버지 나 죽는 거야? 왕자가 울었다. 짐이 미안하구나.
신하들은 반바지를 입지. 화가 난 짐을 향해 무릎을 꿇어. 머리를 풀고 엎드려서 얼굴을 감추지. 짐이 먼저 서러웠는데.
왕이 우는 신하들을 일으켜 쓰다듬는다.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그 말을 어디서 배웠어요.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 짐의 무릎은 깨끗하단다. 그런데 왜 손바닥에서 삶은 계란 냄새가 나죠?
화가나면 방문을 잠가버리렴. 얼굴이 시뻘개진 네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온다면. 어쩐지 미안할 거야.
반바지들이 몰려온다면. 머리채를 잡고 피투성이를 만들겠어요.
마음껏 계획하렴. 허리를 편 내시처럼. 너는 아직 당당해도 좋을 때란다.
일어서시오. 그들은 헤맑게 상투를 감는다. 신臣들은 오뚝이 같군. 무릎은 까졌지만 멀쩡합니다. 물러들 가라.
짐은 폭군처럼 피곤하구나.
신臣들의 불찰입니다. 헐레벌떡 그들은 망건을 풀고. 천진하게 무릎을 꿇지. 폐하 통촉하세요. 바지가 점점 짧아집니다.
짐은 팬티만 입은 것처럼 허전하구나. 아버지는 겁쟁이에요. 짐이 미안해. 사과하고 싶어서 아빠가 너를 낳았지. 필요하니까
너도 애를 낳으렴. 깨끗한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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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 1987년 경기도 과천 출생, 2010년 <현대문학>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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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은 가족공동체 내부에서만 감지되는 미묘한 정서를 '아이들'의 시각에서 포착해낼 때 특히 성공적인 결과에 도달하고는 했다. 이번 시는 '가족심리사극'이고 소재는 '사과'다. 왕은 세자에게, "짐은 본래 사과를 받는 사람"인데, 신하들의 사과를 받는 게 미안하고 그 미안함이 억울해서, 그러니까 자신도 "사과하고 싶어서" 너를 낳았다,라는 기묘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덧붙인다. 사과를 하고 싶으면, "너도 애를 낳으렴." 이 매력적인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인가.
'사과하는 사람'과 '사과 받는 사람' 중에서 심리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후자일 것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 시는 그 통념을 엎어버린다. 때로는 사과를 받는 사람이 더 미안해질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럴 경우 사과를 하는 쪽이 권력관계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요컨데 '사과의 정치학'이라고 할까.
이것은 날카로운 통찰이다. 부모의 사과를 받을 때 우리 자식들의 심리적 정황이 어땠는지 돌이켜보라. 권력관계의 우위에 서고 싶으면 애를 낳아서 그에게 사과를 하라는 이 시의 지령은 그래서 통렬하다. 이 시가 현대 가족이 아니라 왕조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 사과의 정치학을 더 선명하게 구현하기 위해서였겠지. 내 기억으로는 이런 테마를 한국시에서 본 것은 처음인 듯싶다. 특유의 '우울하게 껄렁한'화법도 매력적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출처 : 대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 그 후
글쓴이 : 아는 후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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