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문학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 황병승

빛의 염탐꾼 2014. 6. 30. 15:27

신형철의 평론집을 읽다가 아래시를 만난다. 충격 그자체다.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 황병승

태양남자 애인 하나 없이 46억 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구를 비췄다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영화(榮華)를 누리겠다고. 여름, 일 년에 한 번 나 자신을 강렬하게 책망했다

늙은 나무들 과수원 바닥에 사과 배 대추 감, 열매들이 떨어질 땐 너희들이 먹어도 좋다는 게 아니고 우리들이 또 한번 포기했다는 뜻이다, 가을

미스터 정키 어떤 계절은 남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또 어떤 계절은 순식간에 싸늘해져서 남자도 여자도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부터 차가워지지
...
힙합 소년j 친구들은 늘 우정이 어쩌구 선후배가 어쩌구 떠들어대지만 스윗숍(sweet shop) 앞을 지날 때면 부모 형제도 몰라봅니다 친구들은 커서 달콤한 가게의 핌프(pimp)가 되겠죠
나는 다릅니다 나는 생각이 있어요 붓질을 잘 하면 도배사 하지만 글을 배워서 서기(書記)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이소룡 청년 차력사인 아버지의 쉴 새 없는 잔소리에 머리가 늘 깨질 듯이 아팠다 쌍절곤 휘두를 힘도 없다 가끔 정키 씨를 불러 리밍을 시켰다

저팔계 여자 벽을 따라 게처럼 걸었죠 귀에는 이어폰 을 꽂고 볼륨을 높였지만, 녀석들의 킬킬거리는 소리가 땅 파는 기계처럼 내 몸을 흔들었죠.......
그러나 더는 울지 않는 여자, 거리의 핌프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날마다 순돈육 소시지를 먹었다

그리고 겨울 날개를 가진 짐승들은 모두 남부 해안으로 떠나고 이제 비유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계절

깊은 밤이었고 눈이 내렸다
스윗 숍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은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 전체로 번져 나갔다

늙은 나무들은 포기를 모르고 맹렬히 타올랐다
힙합 소년 j는 달콤한 가게의 구석방에서 창녀 셋과 뒤엉킨 채 숯불구이가 되었고
이소룡 청년은 차력사인 아버지를 때려눕히고 아비요! 교성을 지르며
늙은 남자의 항문에 쌍절곤을 쑤셔 박았다
죽음도 삶도 아닌 세계, 붉은 해초들이 피어오르는 환각 속에서
미스터 정키는 끝없이 헤엄쳐 나갔고
태양남자, 언덕 위에 누워 46억 년 만의 휴식처럼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만든 불일까, 잘 탄다

저팔계 여자는 순돈육 자지를 달고 불 속을 걸었다

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황병승 -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5

'시는 섹스를 말한다 - 한국시, 체위의 역사'라는 평론에서 네 편의 시 중 마지막이 황병승의 시다. 참고로 나머지 세 편과 부제를 보면

'성' - 김수영(김수영 전집-시, 민음사) /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김수영의 정상위

'늙은 창녀' - 장정일(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민음사,1988) / "사랑은 미안함의 추악함을 하나씩 없애가는 거야" - 장정일의 후배위

'가족극장, 이리 와요 아버지' - 김언희(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민음사,2000) / "그래 봤자 아버진 갈보예요"- 김언희의 기승위

황병승의 시에 대한 부제는 / "누가 만든 불일까, 잘 탄다" - 황병승의 새로운 체위

리밍 - 항문 주위를 핥는 것
스윗 숍 - 달콤한 가게, '창녀촌'을 뜻하는 은어
핌프 - '기둥서방'을 뜻하는 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