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독서일기

기억만할 구절 들 - 전경린의 여름휴가 외

빛의 염탐꾼 2015. 3. 11. 14:32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의 '폭포' 전문

 

그렇게 많은 환멸을 겪은 뒤에도 또다시 몸 어딘가에 희망이 꿈틀거리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희망이란 스스로를 호객하는 속임수였다 

꿈이란, 자신에 대한 호객행위이고 삶에 대한 강박일 뿐이었다

전경린의 단편 '맥도날드 멜랑콜리아' 중에서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긋났을까......삶이 주무르는 대로 머리를 들이밀고 호락호락 반죽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을 것이다. 삶에 대해 미리 상상하고 꿈꾸었던 것이 잘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균열의 뿌리는 질기고 독하게 그들을 끌고 갔다. Y와의 첫 만남으로, 만남 이전 각각의 성장기로, 각각의 출생으로, 출생 이전으로...... 그리고 그들의 생이 끝날 때까지, 생이 끝난 뒤에도 얼마든지 끌고 갈 것이다.

 

현실을 과거로 만드는 결단, 그 외에는 삶을 바꿀 방법이 없었다.

 

삶은 얼마나 음험하고 찬란한가. 축제 뒤에는 형벌이 오고, 형벌 뒤에는 위로가 오고, 위로 뒤에는 권태가 오고, 권태 뒤에는 불감이 오고, 불감 뒤에는 다시 파괴의 축제가 오지. 어디에서도 머물 수 없다

전경린의 단편 '여름휴가' 중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달리며 사는 것을 고독하지 않은 거라고 착각하지요."

전경린의 단편 '밤의 서쪽 항구' 중에서

 

머물 수 없다. 어디에서도머물고 싶었으나.... 내가 원했으나

삶은 항상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밀었다

내가 가는 거라고 생가했는데

어느 순간 알았다. 내가 떠밀려 가고 있음을

삶은

나를 참 적절하게도 이리 저리 뒤흔들며

나를 데려다 주었다

목이 마를 땐 사막으로

따뜻한 모래가 그리울 땐 차가운 물가로

덕분에 나는 점점 단단해져 갔다

이제 내 등은 딱딱해졌다

사막에 누워도

파도에 휩쓸려도

싸늘하게 부서지는 파도도

온몸이 타오르는 뜨거움도

느낄수 없다

오늘도 꿈을 꾼다

내 등이 다시 말랑말랑 해지는

꿈을....

전경린의 '여름휴가'를 읽고, 김영심 - 다음 블러그 바람과 맞짱 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