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풍문으로 들었소

빛의 염탐꾼 2015. 5. 12. 15:17

풍문으로 들었소

2015, 5, 12

 

그녀는 붉은 노을이라고 했다

필리핀 태생이라고 했다가 태평양 근처

괌 어딘가가 고향이라고 은근슬쩍 비틀었다 어쨌든

동남아에 한국이름은 또 뭡니까, 혹시 이중국적

그게 말입니다 다국적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적불명이라서요 그녀는 하루 아침에

돌핀으로 바뀌어 대양을 솟구쳐 올랐다

멀게는 지중해에서 왔다고 하고

가깝게는 제주도 이어도 쯤에서 왔다고 했다

어떤 이는 남지나해에서 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오키나와에서 왔다고 했다

새벽이라고 불꽃이라고도 했고

울음이라고 눈물이라고도 했다

나비였다가 너구리였다가 매미였다가

꺽지에서 신출귀몰 임꺽정으로 다시

홍길동이 되어 율도국을 세웠다고도 했다

대체로 낭만적 성품이었으나 어떤 날은

한없이 폭력적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열대와 아열대, 온대와 냉대를 왔다리갔다리

저기압 전선을 타고 희망적이고도

패배적인 온갖 풍문을 쏟아내었다

무시무시하고도 연약한 그녀의 시작은

알고보면 신데렐라 동화에 빠진

작은 물방울, 오늘은 인어공주

내일은 얼음공주, 공주병과 변신은

여자에게 무죄이고요 갈아입을 옷은

옷장에 널렸는걸요

 

오늘밤은 어느 인형의 집에서

온갖 공주들이 내 옷이야 내 옷이야

안면몰수 머리채 잡고 싸우고 있나

밤새 비바람이 한없이 얇은 내 귀를 때리고

풀들에게서도 꽃들에게서도

조금씩 바람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