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4일
오키나와 쯤에서 불어오는 태풍과 판문점 근처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풍문에 오늘은 잠을 설칠 듯 하다. 비바람에 실려오는 소문같은 시 세편을 올려본다.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느끼며 제발제발 무사히 넘어가길 바란다. 혁명이 있어야 될 지 없어야 될 지는 암튼 나도 아리송하지만 전쟁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저 바다와 강에 가득한 녹조만 걷어가길.....
홍수-신경림(시집 '쓰러진 자의 꿈' 중에서, 1993년 창작과 비평)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저 크고 높은 통곡을.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더러 곳곳하게 잘 자란 나무가 잘못 꺾이고
생글거리며 웃는 예쁜 꽃목이
어이없이 부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 연약한 벌레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애타게 울부짖는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지켜보는 허망한 눈길이 있더라도.
장마전선-황진혁(미발표, 1991년, 지금 읽어보니 문제 투성이지만 신경림시인의 시보다 일찍 쓰여졌다는게 믿어지지 않네그려. ㅎㅎ)
아침상 물리며 서둘러 준비하라
내 머지않아 바다와 산맥을 넘어 북상할 테니
피비린내 나는 비의 전선을 펼칠 터이니
마른 침 삼키며 죽어가는 풀포기야
배부른 자의 업보를 지게에 얹고
소처럼 우직한 너희들만 도적으로 쓰러지고 있으니
땅 끝을 파고드는 뿌리는 어딜 가고
스치는 잔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느냐
너희들 허약한 팔다리 깨우기 위해
세균처럼 번진 독소롤 게워낼 힘의 절정을 위해
오뉴월 무서운 한맺힘으로
피멍드는 천년의 부름을 몰고 갈 지어다
서너 달 쉬지 않고
천둥 번개 태풍의 비바람을 뿌릴 지어다
짓밟혀 살아온 천지사방 풀포기야
강요된 제초제로 농약으로
분노를 잘라버리며 살아가는 들판은
텅 빈 침묵의 울음소리 뿐
둘러 보라
지금은 태초를 거슬리는 구약의 모래성전으로는
새벽을 깨우지 못하느니
너희가 넘어야 할 길은 억센 노동을 잉태하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높고 험한 해방준령
혼자서 도피하려는 방주의 닻과 노는 일찌감치 버려버려라
오직
갑오년 함성 같은 삽자루 낫자루 준비하지 않으면
서슬 퍼런 죽창을 갈지 않으면
너희에겐 또다시
흉흉한 물난리만이 기다릴 터이니
멍석말이 죽음만이 기다릴 터이니
풍문으로 들었소-황진혁(2015, 5, 12 초고)
그녀는 붉은 노을이라고 했다
필리핀 태생이라고 했다가 태평양 근처
괌 어딘가가 고향이라고 은근슬쩍 비틀었다 어쨌든
동남아에 한국이름은 또 뭡니까, 혹시 이중국적
그게 말입니다 다국적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적불명이라서요 그녀는 하루 아침에
돌핀으로 바뀌어 대양을 솟구쳐 올랐다
멀게는 지중해에서 왔다고 하고
가깝게는 제주도 이어도 쯤에서 왔다고 했다
어떤 이는 남지나해에서 왔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오키나와에서 왔다고 했다
새벽이라고 불꽃이라고도 했고
울음이라고 눈물이라고도 했다
나비였다가 너구리였다가 매미였다가
꺽지에서 신출귀몰 임꺽정으로 다시
홍길동이 되어 율도국을 세웠다고도 했다
대체로 낭만적 성품이었으나 어떤 날은
한없이 폭력적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열대와 아열대, 온대와 냉대를 왔다리갔다리
저기압 전선을 타고 희망적이고도
패배적인 온갖 풍문을 쏟아내었다
무시무시하고도 연약한 그녀의 시작은
알고보면 신데렐라 동화에 빠진
작은 물방울, 오늘은 인어공주
내일은 얼음공주, 공주병과 변신은
여자에게 무죄이고요 갈아입을 옷은
옷장에 널렸는걸요
오늘밤은 어느 인형의 집에서
온갖 공주들이 내 옷이야 내 옷이야
안면몰수 머리채 잡고 싸우고 있나
밤새 비바람이 한없이 얇은 내 귀를 때리고
풀들에게서도 꽃들에게서도
조금씩 바람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