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안개의 밀도

빛의 염탐꾼 2016. 9. 12. 13:16

안개의 밀도

2016. 9. 12

 

 

안개가 좋다 성에 낀 창이 좋다 잿빛이 좋다 회색이 좋다 오리무중이 좋다 침침한 눈이 좋다 황사가 좋다 미세먼지가 좋다 중국발이 좋다 좌충우돌이 좋다 뒤죽박죽이 좋다 연쇄추돌이 좋다 저기압이 좋다 심심함이 좋다 가시거리 제로가 좋다 영영이별이 좋다 어영부영이 좋다 곡선과 우유부단이 주저와 머뭇거림이 우물쭈물 망설임이 좋다

 

흐리고 뿌연 것이 좋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갈팡질팡 경계가 좋다 굵은 자물쇠가 채워진 문패없는 대문이 좋다 근본 없고 태생도 모르는 한강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들이 좋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가는 것이 좋다 뜬구름이 좋다 싱크홀이 좋다 찾아도 찾아도 찾지 못하는 화장실 변기의 누수가 좋다 어느날 갑자기가 좋다 나도 모르게 불안이 좋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당리당략이 좋다 적과의 동침이 좋다 푸른 녹조로 뒤덮인 4대강이 좋다 표시불가와 표현불가가 좋다 원인불명 인과관계 없음이 좋다 어느 불세출 영웅의 낯간지러운 선동문이 좋다 대동단결 대동결사 입에 발린 소리가 좋다 아이러니가 좋다 아포리아가 좋다 답이 없다와 말줄임표가 좋다 모순과 부조화가 좋다 모든 불가해와 덧없음이 좋다 나의 진정성을 대놓고 의심해도 좋다 새빨간 거짓말이 좋다 신뢰도 0% 오차범위 ±100%가 좋다

 

내가 내 눈 앞에서 하얗게 사라지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