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개 이야기
어느 고개 이야기
백두대간 죽령과 조령 사이에 설령 혹은 가령이라고 불리워지는 큰 고개가 하나 있어요 여기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는데요 때는 조선시대, 수차례 낙방경험이 있는 어느 선비가 추풍령도 죽령도 조령도 싫다며, 가령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등의 속설을 믿고 또 다른 고개를 택해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이였어요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날은 저물고 주막도 보이지 않자 마지못해 어느 민가에 잠자리를 청했어요 그 민가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선비는 그만 그녀와 눈이 맞아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말았어요 다음날 울며불며 막아서는 여인에게 선비는 정표라며 도포자락에 붙은 옷고름을 떼어주며 반드시 급제해서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안심시켰어요 돌아올 때는 고갯마루에서 급제 퍼포먼스, 가령 자신의 나머지 옷고름을 떼서 휘날린다거나 하는 그런 행위를 벌일 거라고 했어요 여인은 선비가 설령 과거에 급제 못할지라도 자신은 개의치 않으니 영원히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요 선비는 떠나고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선비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여인은 날마다 고갯마루에 올라 옷고름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흔들며 선비를 기다렸지만 선비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고 그러기를 몇 해, 시름시름 앓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어요 (그리고 한양) 선비는 과거에 급제한 나머지 너무 기뻐서 하나 남은 옷고름마저 떨어져 나가는지도 모른 채 주색에 빠져 살았어요 급제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령 술과 여자 그런 것쯤 될 테니까요 몇 해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비는 그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그만 돌로 굳어지고 말았어요 후세 사람들은 두 연인의 슬픈 이야기를 빗대어 그 고개를 설령 혹은 가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 곳에 가면 여인이 매달아 놓은 옷고름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어요 이제는 사랑의 명소가 되어 영원을 맹세하는 리본을 나뭇가지에 매다는 연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요 그 고개에 가면 알 수 있어요 가령은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고 설령은 맹목적인 집착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설령 그 선비가 유부남이었더라도 그 여인이 과부였더라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이란 가령 그런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