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염탐꾼 2019. 7. 13. 16:32

장독대

    


 

저 독 안에는 천년 묵은 능구렁이가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할머니는 늘 나에게 절대 열어보지 마라 신신당부하며

장독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지요


조상 제사랍시고 모여 어른들은 날마다 싸워요

조율이시다 홍동백서다 어동육서다

내 나이 열두 살, 알 건 다 알아요

그게 다 독 안에 살고 있는 구렁이가 꾸민 짓이라는 걸

매관매직과 신분세탁, 불천위 어쩌고 하는 놈들도

장독 속에 한 데 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도 모르고요

무덤을 호위하고 있는 수많은 비석들과 문인석들도

장독대에서 흘러나온 능구렁이의 타액을 받아먹고

천년만년 서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 어려운 단어는 어떻게 아느냐고요

무시하지 마세요, 고학년이라고 올해 처음으로 학교에서 배웠어요

모든 은 물보다 진하고

천년만년 이어질 가문의 자랑

할머니는 오늘도 얘기해요

 

절대 부러지지 않는 뼈대 어쩌구 저쩌구, 그리고 나서 한마디 합니다

봄에 담은 꽁치젓은 제대로 익어가고 있는지 장독 좀 열어봐라, 아가야

언제는 얼씬도 못하게 하고서리, 나는 젓갈 넣은 김치 안 먹을래요, 할머니

그리고 제발

 

유통기간 지난 식품 냉동실에 그만 넣으세요

저도 이젠 키 쓰고 옆집에 가서 소금 얻어오던

오줌싸개 어린이가 아니고요

소금만 먹는다고 천년만년 사는 건 아니잖아요

 

때론 썩은 것들이 주름잡는 정체 모를 맛도 있긴 있나 봐요

어느 해인가 가족여행으로 보은 선병국가옥에 갔을 때

삐까번쩍한 기와집 아래, 마당을 가득 채운 장독의 수를 보고

할머니는 놀라는 눈치였어요

나는 그게 다 판매용이라고 말하려다가

부러워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보고 참았어요

그리고 중국여행 가서 먹은 취두부

모든 어른들은 바로 뱉어냈고

나는 오묘한 깊은 맛이 난다며 하나 더 먹었어요

모든 들은 오래된 술처럼 중독성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오묘하다느니 깊다느니 하는 모든 평가는

경계에 넘어서면 참으로 인색해지는가 봐요


내 눈에 뭐가 씌였는지 이제

가을날의 황금들판도 또아리 튼 거대한 능구렁이로 보이는데요

 

평해황씨 집성촌 우리 마을 노인회관에 가면

상처에는 된장이 최고야

차라리 똥물을 퍼마셔라 이놈아

오늘도 장맛타령 똥물타령을 하며

나란히 둘러앉아 점십고스톱을 치는

세상에 절여지고 절여져 곰삭은 능구렁들이 모여 있어요


별종이고 독종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