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염탐꾼 2019. 11. 6. 17:27

국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장안의 화제가 된 후 누님이 없는 전후세대 사내들은 결핍감 때문에 참 슬펐다지 그들은 술에 취해 쓰러진 다음날 아침이면 옆자리가 텅 비어있는 초라한 여인숙에서 어김없이 황량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보았다지 거울 속으로 보이는 것이 한 송이 국화꽃 이였는지 또 다른 꽃 이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몰라 사내들이 가을을 타기 시작한건 언제인가 비교적 젊은 시절에 죽은 친구의 장례식장, 빈약한 국화로 장식한 영정 앞에서 한 송이 국화를 손에 쥔 나는 잠시 손을 떨었지 그게 이십대 때 그 놈에게 맞은 기억 때문인지 가끔씩 그 놈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 생각이 떠올라서인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너무 슬퍼 보이는 국화의 흰 색깔 때문이었는지는 하여간 지금도 모르겠어 모든 헌화의 형식에는 위선이 잔뜩 묻어 있고 어떤 모임에서 나는 조문헌화에 국화보다 장미가 더 어울리지 않냐고 말했다가 너란 놈은 도대체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다며 집단린치에 맞먹는 떼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어 나는 어떤 꽃들은 생화보다 조화가 더 슬퍼 보인다고 대꾸하려다가 진짜로 집단린치를 당할 것 같아 가까스로 참았지 가끔씩 지인들이 보내오는 화환과 화분은 절대 사절합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초대장을 보면 이심전심의 마음가짐과 총알배송을 모토로 꽃배달서비스를 운영하는 내 친구의 말이 생각나 그 친구는 자주 근조화환과 축하화환이 헷갈린다고 했는데 그건 쓰이는 꽃 종류가 다르기도 하지만 화환에 써넣을 문구 때문이라고 했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도 고스톱에서 국화피가 청단인지 홍단인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만큼의 슬픔이 필요한지 모르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어 자식들이 어버이날 가슴에 달아주는 카네이션이 국화로 보이기 시작하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그걸 믿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는 그저 개인 사정이고 어쨌든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감국 개미취, 가을에 피어나는 국화과의 이름들은 다들 슬퍼 보여서 오늘 아침 나는 소쩍새에게 천둥과 먹구름에게 무서리에게 이제 그만 나를 놓아 주세요라고 말을 걸고 싶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