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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 띠를

빛의 염탐꾼 2019. 11. 14. 12:51

허리에 띠를

 

 

 

중국 남쪽지방에 요족(腰族,Yaozu)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어요 이 민족은 한족을 비롯한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서 여인들의 허리가 가늘기로 특히 유명한데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의족(螞蟻族,Mayizu)이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요 가는 허리가 미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이 민족의 구성원들은 평소에는 뿔뿔이 흩어져 개미처럼 일을 하며 살다가 일 년에 한 번 한자리에 모여 요안절(腰安節,yaoanjie)이라는 성대한 축제를 열어요 이 기간에는 풍년을 가져다 준 신과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며칠간 허리 펴고 신나게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지요 요안절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허리에 요란한 장식을 한 띠를 두르고 나와서 하와이 훌라춤 비슷한 춤을 추며 가는 허리를 뽐내는 개미허리선발대회인데 보기에는 어깨에 띠를 두르고 나와서 몸매 자랑하는 우리나라 미스코리아선발대회랑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냥 한마디로 줄이면 누가 누가 더 허리띠 졸라매고 살았느냐를 자랑하는 대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 대회는 개미처럼 가는 허리 외에도 각자의 인생무용담과 성공담을 누가 더 허풍스럽고 과대망상적으로 스토리텔링 하는가도 채점의 중요한 기준이 된 답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죽을 똥 살 똥 모르고 살았다는 뭐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드리고자 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근래에 들어와 일었던 요족의 허리가 기형적으로 가늘어지게 된 이유에 대한 논쟁입니다 대부분의 민속학자들은 평소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만 하고 사는 이들의 생활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지만 일찍이 요족의 가는 허리를 주목한 일부 미용성형회사들이 요족들의 허리에 둘러진 허리장식을 벤치마킹하여 요족 여인들의 허리장식물이 허리싸이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온갖 광고를 쏟아내었답니다 당연하게도 피부와 몸매에 민감한 젊은이들을 필두로 한 일반대중들은 요족의 허리장식물에 온통 눈이 쏠리게 되고 이를 차용한 미용성형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답니다 지금 일반대중들 사이에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민속학자들의 내용은 뒤로 물러나고 허리장식물이 요족 여인들의 가는 허리를 만들어 내었다는 설이 유력한 설이 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요족 여인들이 가는 허리를 동경한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얘기예요 지금은 가는 허리가 미의 기준이 되어 있지만 이 현상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요족 전통사회에서 다이어트다 코르셋이다 하는 그런 개념들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냥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이랍니다 개미 허리가 달리 가늘겠냐고요? 하지만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고 세간에 알려진 요족 여인들의 허리장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과 부합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요족 여인들이 지금처럼 분수에 맞지 많은 과도한 허리장식을 한 건 아니였어요 요족 여인들의 허리장식은 그들의 가는 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지금도 정설로 여겨지고 있어요 시간이 갈수록 더 열심히 일하다보니 허리는 차츰차츰 더 경쟁적으로 가늘어지고 그에 비례해서 허리장식물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져만 갔어요 지금도 요족 전통마을을 가보면 여인들이 우리나라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금제허리띠보다 더 값진 보석으로 치장한 허리장식물을 걸치고 다니는 걸 쉽게 볼 수 있어요 유식한 말로 혁대나 벨트라고요? 뭐 어디서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장면이 담긴 포르노를 많이 본 모양인데 제발 허리띠로 졸라 맞기 전에 좋은 말로 할 때 닥치고 가만있으시죠? 또한 이 사회에는 젊은이들이 성인이 되면 가장 먼저 부모님께 화려한 허리장식물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해요 우리가 예전에 첫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색 내복을 사드렸던 것처럼 말이죠 물론 시대가 변해서 요즘의 요족 젊은이들은 부모님께 고급 바클이 달린 명품벨트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그게 어머니 아버지 이제 허리띠 그만 졸라매고 편하게 살아라는 얘기 같은데 그땐 이미 늦은 건지도 몰라요 GUCCIPRADA다 아무리 비싼 제품 허리에 차고 허리 쭉 펴고 싶어도 그게 말이죠 요통이다 디스크다 허리가 펴지지 않는다는데 어쩌겠어요 갑자기 이십대 때 불렀던 민중가요 가사가 머리띠 다시 묶으며 인지 허리띠 다시 묶으며 인지 헷갈리네요 하긴 머리띠가 허리띠보다 더 주동적이고 투쟁적이긴 해요 저도 한 때 개미처럼 사는 걸 인생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주식과 관련된 뉴스에서 소액주주들을 보고 개미들이라고 하는 멘트를 들었어요 그날따라 그 말이 왠지 엄청 기분 나쁘게 들렸어요 개미처럼 살자는 목표는 그날 이후 내 인생에서 바로 폐기되었고요 본능적으로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 개미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고요? 구순 가까운 노모는 요즘도 밭에 나가서 잡초를 뽑는지 동전을 캐내는지 개미처럼 하루 종일 땅을 파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 몸에도 요족 아니 마의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