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력은
나의 달력은
들판에 나가보니 배추 무우 뽑힌 자리 휑하다
달력 안 보고 산 지 오래 되었지만
어느덧 올해도 다 가는구나
달력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온갖 국가기념일을 등에 업은 도대체
대상을 알 수 없는 반복적인 묵념과 추모와 헌화, 울려 퍼지는 춤과 노래, 또는 누군가가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온갖 기일과 생일들 그리고 간혹
오늘 이사하면 대박나요, 손 없는 날도 들어 있고
언제인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동그라미를 표시해 놓은
어떤 여인네의 달력을 보고 연유를 물었다가
서로의 얼굴이 붉어진 적이 있었지
몇 해 전
노래 부용산의 고향 보성 벌교 여행 중에 들른
어느 식당 달력에 적혀 있는 요상한 숫자가 궁금하여 주인에게 물었더니
그게 밀물과 썰물, 즉 조수간만의 차이인
간조와 만조 시간을 표시한 거라는 말을 듣고 다시 보니
그제서야 조금과 사리라는 단어도 보이고
벌교꼬막에 진흙이 많이 나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농협에서 배포하는 달력엔 이십사절기와 함께
농가월령가 같은 온갖 농작물의 파종과 수확시기가 적혀있고 어디에선가
가축들의 발정과 교미시기에 대한 숫자가 무슨 암호처럼 적혀 있는 축협달력을 본 적도 있다
종이가 귀한 시절에는 월력이 아닌
지방 국회의원 인지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인가가 나눠주던 한 장에 365일이 다 나오는 년력도 있었는데 하여튼
1967년 6월생인 내가 년력으로 제일 처음 접했던 우리지역 국회의원의 이름이 오준석이였던 것만은 뇌리에 선명한데
그 후의 국회의원 이름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좀 살고 힘깨나 있다는 지방 유지들의 집에는 희고 얇은 종이로 만든 일력이 있어
화장지가 없던 그 시절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달력의 디자인도 시대에 따라 변해서
한복과 수영복을 입고 나오던 여자탈렌트들의 사진에서 지금은
세계나 한국의 절경이 들어있는 경관사진으로 많이 바뀐 듯한데
구십을 바라보는 노모는
인물이다 절경이다 다 싫고 그저
그림 없이 음력도 큼지막한 아리비아 숫자로만 되어있는
농협 달력을 가장 선호하고 그래서 그런지
신도가 노인들 뿐인 우리마을 교회 달력도
그런 디자인으로 바뀐지 꽤 된 듯하다
어쨌든 나의 달력은
사진이 예쁜 것도
아라비아 숫자 굵게 쓰인 것도 아닌
저 들판과 산
온갖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나무와 꽃들
그 속에는
충만한 자연의 희노애락과 생명과 육체의 번영과 쇠락, 텅 빈 우주가 있다
배추 무우 뽑히고 텅 빈 자리
그렇게 또 한 해가 가고
들판엔 비로소 겨울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