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염탐꾼 2020. 2. 13. 15:05

햇반

    


 

햇반을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엄마표 집밥이 부쩍 더 생각난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그건

햇반이 내세우는 광고카피 때문일 거라는 무성의한 답을 던졌지만 이어서 바로

어떤 의구심과 죄책감이 내 머리를 스쳐갔는데 그건 바로

나는 엄마표 집밥을 이 친구만큼은 그리워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사실 때문 이었다


예전에 산악회에서 만난 어떤 선배는

엄마표 집밥이 그렇게 그립지는 않다고 실토한 유학생 아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부인이 음식실력도 없는데다가 노력도 하지 않아 늘 불만 이였으나

아들놈의 향수병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게 더 다행인지도 모른다며

조금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관악산 정상에서 맛 본 그 선배가 싸온 도시락은 그리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 였기에

선배가 일부러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나는 늘 유명 연예인들이

티브 맛집 프로그램에 나와서 언제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엄마가 차려주던 예전 그 맛이야 라는 멘트가 늘 거슬렸는데

이번 설에 모여앉아 덕담을 나누는 형제들의 표정도 그와 닮아있어

편치 않은 내 마음이라도 들킬까 싶어서 서둘러

햇반을 만들 때 반지르한 윤기를 내기 위해 참기름을 넣는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를 돌려버렸고 그 화제는 잠시나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감자떡에 아스팔트기름을 넣는가 아닌가 하는 예전에 있었던 무의미한 논쟁과 같은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렇게

내 화살이 날아간 곳은 가족주의가 아니라 죄 없는 햇반이었다


혼술 혼밥에 익숙한 나에게는

햇살론이든 햇반론이든

햇볕정책이든 햇반정책이든 어찌 보면

엄마표 무담보 무한신용 금융대출 상품이라도 나왔으면 최고로 좋겠지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절대 그런 상품은 내 앞에 나타날리 없겠고 그저


하늘같은 밥을 넘어 그 보다 더 높은 외로움이 존재하는 이상

팔려나간 햇반이 지구가 아닌 태양계를 몇바퀴 도는 날이 오더라도

그 어떤 밥솥이 만들어내는 밥보다 더 뛰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햇반을 품은 세상이 도래해도

엄마표 백반을 향한 애증섞인 경배는 원시주술처럼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