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공의 무게

빛의 염탐꾼 2020. 8. 30. 17:32

   공의 무게

 

 

 

   올림픽 공놀이 종목을 관장하는 구기국 왕이 공들을 모두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탁구공 배구공 축구공 농구공 등 공은 둥글둥글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모든 공들이란 공들은 부리나케 공나라 궁으로 모여들었다 먼저 왕이 자화자찬성 일장연설 끝에 공들을 불러 모은 이유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짐이 오늘 공들을 불러들인 것은 이 나라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공들의 공의 크기와 무게를 측정하기 위한 것 이오 공들의 공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오늘 공신서열을 매길까 하는데 그럼 누가 먼저 말해보겠소

 

   그제 서야 긴 하품을 참고 있던 공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든 공의 눈이 일제히 제일 만만한 탁구공에게로 쏠리자 탁구공이 마지못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 비록 크기가 제일 작고 무게도 제일 적게 나가나 이 나라를 세우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요 가볍고 가련한 이 한 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적을 소탕하지 않았겠소 탁구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농구공이 탁구공을 말을 가로채며 대궐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딴 시시껄렁한 무용담은 그만 때려치우시오 덩치로 보나 무게로 보나 내 공이 제일 지대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 이오 그러자 골프공이 농구공을 향해 점잖게 나무라듯 말했다 이보시오 공은 크기만 컸지 실속이 없었소 요즘 애들 말로 가성비라는 것 말 이오 내 비록 몸은 작으나 그 있잖소 괴력의 장타로 적지에 깃발을 꽂은 건 바로 나요 그러자 뒷자리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럭비공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저와 미식축구공은 이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어도 둥글둥글 원만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차별을 받고 있어요 그러고 보면 공이 다 둥글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건 절대 아닌듯합니다 그러자 구석자리에서 쥐 죽은 듯 잠자코 듣고 있던 하키공이 왕을 향해 억울하다며 읍소했다 럭비공은 저희한테 대면 그래도 양반입니다 저희 하키공과 배드민턴공은 언제나 이 나라 정책에 딴죽을 건다며 이번 예비공신목록에서 아예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름마저 셔틀콕이라나 퍽이라나 요상한 놈으로 바뀌었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저희들도 모르겠습니다 바다 건너 어떤 나라는 아이들이 몇 백 명이나 바다에 빠져 죽고 이런 저런 재앙이 겹치고 해서 수 백 만 명이 촛불을 들어 부패한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했는데 그 공을 모조리 한쪽에서 다 차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키공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장내가 웅성웅성 시끄럽게 되자 왕이 소리쳤다 듣자듣자 하니 더 이상은 못참겠소 탁상공론들은 그만 하고 다들 그 입 다무시오 그리고 나서 내시들에게 명령했다 얼른 저울을 대령하라 순식간에 저울이 도착하고 왕이 더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안 되겠소 이 방법밖에 없는 듯 하오 이 나라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공들의 공의 무게를 재려 하니 차례로 다들 저울에 오르시오 십 분이 삼십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가도록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자 왕이 태연히 저울에 오르고 바로 이어 저울의 눈금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눈이 있으면 다들 똑똑히 보시오

 

   이 나라가 온전히 우리 차지가 된 것은 짐의 공이 가장 크다는 걸 이 저울이 대신 말해주고 있소 내 말에 이의를 다는 자들은 바깥으로 쫓아 낼 것이고 조용히 내 말을 따르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보상을 해 드리는 건 물론이오

 

   하 하, 공놀이의 참맛은 가로채기, 그게 바로 구기의 묘미 아니겠소 권력이란 원래 뒷짐 지고 어슬렁어슬렁 관망하다가 결정적일 때 움켜잡는, 공은 탁구공만큼 세워 놓고 농구공만한 공치사를 하는 얌체족들이 가로채는 것 이라오 이리저리 구르고 돌고 도는 공, 자 패스 패스, 자 이제 누구에게 공을 넘길까요 슛 골인, 아니고요 에이 역시나 패스미스, 왕이 스스로 도취되어 실성한 듯 어전이 떠나갈 듯 큰소리로 횡설수설하자 새롭게 공신으로 책봉된 한 무리의 대신들이 일제히 왕을 향해 공나라 찬가를 합창했다

 

   "공 공 무슨 공 쟁반같이 둥근 공

   어디 어디 떴나 남산 위에 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