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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빛의 염탐꾼 2020. 9. 27. 11:00

   고추잠자리

 

 

   남호선호사상이 유독 강한 어느 마을이 있었어요

   어느 해 가을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마을의 사내아이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어요

   원인도 해결책도 몰라 마을전체가 멘붕에 빠진 가운데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어요

   어떤 노인은 굿을 한 판 크게 벌여야 한다고 말했고

   또 어떤 노인은 이게 다 호시탐탐 동네를 넘보는 북쪽 마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어요

 

   북쪽 마을을 운운하는 이 추론은

   이 동네의 우두머리들이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사건건 북쪽 동네를 표적으로 삼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 스스로도 늘 의아해하는 하는 건

   북쪽 마을에 대해 자신들 맘대로 붉은색으로 덧칠해 놓고서

   스스로 경기를 일으킬 만큼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싫어하는 대상이 사람도 물질도 아닌 색이라는데 있었지요

 

   그러고 보면 이 색깔론은 남아선호사상과 함께

   이 마을을 오래도록 배회하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이 동네의 우두머리들은

   이념이니 정책이니 하는 대안 제시는 뒤로 한 채

   언제나 색깔론으로 정쟁을 일삼고 파벌싸움을 벌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마을 사람들에게

   이 색깔론은 먹혀들지 않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 해 가을 역병까지 도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역병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을은 원로들을 중심으로 비상위원회를 꾸려

   나라 안에서 전염병해결에 용하다는 점성술사를 물색했으나

   물망에 오르는 마땅한 사람 하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북쪽 고개를 넘어 한 사내가 나타났어요

   그 사내는 피리를 불고 홀연히 나타나서 피리를 불며 홀연히 사라졌기에

   훗날 마을사람들은 그를 피리 부는 사나이로 불렀지요

 

   그 사내가 고개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어찌된 일인지

   때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만큼 지났건만

   산과 들의 나뭇잎들은 하나같이 초록빛이고

   고추밭의 고추들도 한결같이 푸르렀어요

   더 희한한 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 중에서

   고추잠자리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답니다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긴 사나이는

   마을의 원로들에게

   마을에 액과 악귀를 쫓아내는 붉은 기운이 부족해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화가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원로들은 사내의 주술적 해석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도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전적으로 사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어요

   사내는 피리를 불어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불러들여

   몸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해서 다시 날려 보내기를 반복했어요

 

   그제서야 바른 소리를 잘하기로 유명한 어느 노인이

   일반잠자리와 고추잠자리는 종이 달라

   그런 눈속임으로 사람들은 속여도 귀신은 속일 수 없다고 사내에게 따졌어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또 다른 노인은

   도시 친구가 예전에 자기집에 놀러 왔었는데

   파란고추와 빨간고추가 한 가지에 함께 달린 것을 보고

   둘이 다른 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하면서 깜짝 놀라더라며

   요즘 귀신들도 그 친구처럼 농촌사정을 모르기는 매일반일 거라며

   잠자리 바꿔치기를 해도 하등 문제가 없다고 사내의 행동을 옹호했어요

 

   잠자리색 덧칠하기의 효과 때문이였는지

   아니면 전염병 특유의 성질 때문이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역병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시름시름 앓던 사내아이들도 말끔히 회복되어

   마을에는 오랜만에 평온이 찾아왔어요

   동네의 원로들은 사내를 불러

   크게 하사하고 이제 마을을 떠나도 좋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사내가 피리를 불며 마을 밖으로 향하기가 무섭게

   어찌된 일인지 마을의 사내아이들도 모두 사내의 꽁무니를 따라가기 시작하는 것이였어요

   부모들은 매를 들어 아이들을 어르고 또 한편으로는 온갖 달콤한 것으로 아이들을 유혹하며 달래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렇게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마을 아이들의 행방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묘연했어요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든 나뭇잎의 색깔을 헷갈려했고

   파란고추들이 여물어 서서히 붉어지듯

   일반잠자리가 가을이 되면 조금씩 물들어 고추잠자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고추잠자리가 안 보이는 건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아서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살았어요

 

   물론 된장 항아리 안에 붉은고추를 넣는 풍습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아들이 태어나도 붉은고추를 처마에 매다는 풍경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