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산문

똥에 관한 글

빛의 염탐꾼 2008. 8. 24. 04:32

작아    2005-07-20 16:30:59  

고추나 배추, 당근, 토마토, 가지, 상추 같이 우리가 심은 것은 다 우리 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몸 역시 그 근원이 똥에 있고, 땅에 있다. 곧 똥은 땅이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며 우리 몸을 지탱해주는 자양분이다.


큰 일을 보다

밤에 외우는 주문 │노정환 (월간 <인권> 편집)│

대략 무대 설정은 이랬다. 안채는 야산자락을 등에 두고 앉은 채 서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안채 마루 밑에는 닭장이 있다. 안채에서 마당을 지나면 안채를 마주보듯 초가집 한 채가 있다. 치간(화장실)이다. 그 치간 앞쪽에는 퇴비더미가 쌓였다. 아버지가 틈나는 대로 들판이나 논두렁에서 베 온 풀더미였다. 네 살부터 열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시골집의 구조다. 요즘에야 안방 한 귀퉁이 문만 열어도 화장실이지만, 20여 년 전의 시골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엔 치간 가는 일이, 특히 밤에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똥을 누고 난 뒤 그 뒤치닥거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치간의 내부 공간과 위치가 준 무서움 때문이었다.
무서움은 무엇보다 치간의 구조가 한 몫 했다. 볼일을 보는 곳의 앞쪽은 벽인데, 허물어진 벽 틈으로는 안채가 보여 나름대로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뒤쪽은 텅 비었다. 두엄더미가 놓였지만 그것이 안락함을 주지는 못했다. 채웠으되 빈 곳만 못한 꼴이었다. 뒤쪽에서 밀려오는 공포가 앞쪽에서 주는 안정보다 몇 배는 높았다.
더욱이 오직 볼일 보는 일 말고는 달리 주의를 둘 만한 소품 - 지금으로 치자면 신문이나 잡지 -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떠오르는 것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귀신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런 치간이 부모님이 계시는 안채와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여기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에는 어둠을 밀쳐 낼 불빛도 없었다. 그나마 손전등에 의존해 볼일을 봐야 했다. 그래서 저녁에 치간에 갈 때는 반드시 부모님이나 누이를 치간 앞에 세워 두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치간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마당에 쌓아둔 두엄더미 가장자리에 볼일을 봤다.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안채에서 가까웠다. 또한 사방의 공간이 트여 치간의 닫힌 구조보다는 무서움이 덜 했다.
그런 내게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은 주문 한 가지를 알려 주었다. 그 주문은 치간에 갔다 온 뒤 안채로 들어가기 전에 읊조렸다. 안채 마루 밑에 있는 닭장에 큰 절을 두 번 하면서.
“닭이 밤에 똥 싸제 사람은 밤에 똥 안 싼다.”
기원이나 출처도 알 수 없고, 효능도 알 수 없는 주문이었다. 그럼에도 그 주문은 당시 내게는 밤에 치간가는 그 두려움을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날 암모니아 냄새에 대한 변명 │황완규 (녹색연합 자원활동가)│

“코를 때리는 요상한 냄새가 나면 손을 든다. 알았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되는 웃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오후 자연시간, 선생님은 무슨 병 하나를 교실 앞 모서리에 갖다 놓고 우리들을 향해 굵고 짧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험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하나둘 차례로 손을 들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어서 주위를 둘러본 나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나중에서야 선생님은 오늘 실험이 암모니아 냄새가 퍼지는 방향에 대한 것이라는 설명을 했고 암모니아는 화장실, 즉 똥에서 나는 냄새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날, 끝까지 손을 들지 않은 한 아이가 있었다. 단상 앞으로 불려나와 암모니아 병에 직접 코를 박고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 그 아이는 그 다음날인가 병원으로 갔고 촌놈들인 우리들의 머리에 ‘축농증’이라는 낯선 병명을 새롭게 심어주었다. 그 날 조용한 산골학교에서 한 아이가 작은 소란을 일으킬 때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날은 창가로 짱짱하게 쏟아지는 햇볕도 시퍼런 냄새를 풍기던 유신 말기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냄새를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내 아버지가 그러했으니 아마 유전인 것 같다. 똥냄새를 모르는, 더욱이 암모니아 냄새가 구린지 달콤한지도 알지 못하는 내가 왜 손을 들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면 무의식 속에 쌓인 전체주의 사고가 어린 나에게서 은근슬쩍 손을 드는 행위를 이끌어내었는지도 모른다.
그 날 선생님은 그 말 한마디 뿐 어떠한 강압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시절 이미 내 속에 집단이 이방인에게 보내는 따가운 눈초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과 그날의 행동은 성장기 내 ‘집단성을 향한 자발적 동조’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 나도 난다고 나도 안 난다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던, 그렇게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한 나의 성격은 그 날 수면 위로 떠올랐을 것이다. 좋게 말해 눈치가 빠르고 정확하게는 속을 안 보이는 엉큼한 냉전을 온몸으로 뚫고 나온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러했으며 식민지의 힘없는 백성들도, ‘굵고 짧게’보다는 ‘가늘고 길게’를 외치는 이 땅 모든 이들의 바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주체성과 자유라는 분명히 존재하는 냄새를 누군가로부터 빼앗기고 이 땅을 지배하는 모종의 냄새에 손을 들어야 했던 슬픈 역사이다.
나는 화장실 청소를 잘 한다. 초등학교 시절, 화장실 청소당번이 된 친구들의 찌푸린 얼굴을 보며 청소를 자원한 적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간혹 똥을 누고도 물을 내리지 않아 식구들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똥이 왜 구린지도 모르고 가끔은 그것이 이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리고 보니 아침에 내가 뒤를 보고 물을 내렸던가, 내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어때, 다음번 소변 보고 내리면 물 한 대야는 절약한 셈 아닌가, 물 안 내린 놈 손들어 라는 이도 없는데 말이야.

나는 똥이다, 나는 땅이다 │박순희 (문경 귀농가정)│

시골에 처음 내려와 보니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화장실이 무너지고 없었다. 남편은 우선 임시로 집 뒤 켠 살구나무 아래 크고 평평한 돌 두 개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얇은 판자를 이어 붙여 옆벽과 문을 만들었다. 앉으면 보이지 않지만 일어서면 몸뚱이 반이 다 보일 정도로 엉성했다.
처음으로 화장실을 쓰던 날, 두 개의 돌에 발을 얹어놓고 앉아있자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멀리 푸른 산이 보이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였다. 지붕을 대신한 살구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건너편 담 위로 다람쥐가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폐쇄된 공간에서 흰 벽면을 바라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기분 좋은 체험을 하고 난 뒤 화장실 가는 길이 두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도 처음에는 좀 껄끄러워 하더니 이내 적응하곤 스스로 자신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금방 배워나갔다. 아이에게 용변 처리법을 가르쳐주는 동안 아이와 나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 똥은 네 몸속에서 나온 것이니 곧 네 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하면서 나 역시 처음으로 똥이 내 몸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식구들은 점차로 하루치 똥의 색깔과 모양새에 따라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 어제 우리가 뭘 먹었지? 내 똥 색깔이 파래.” “엄마 오늘 내 똥 좀 봐. 모양이 진짜 만화책에서 그려진 것처럼 삼층이야.”
똥 위에 재를 뿌리고 그것을 삽으로 떠 한쪽으로 옮겨 놓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식구들은 똥이 곧 몸이라는 똥철학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양이 쌓이자 남편은 그것을 들통에 퍼 밭에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톱밥을 뿌려 두었다. 냄새도 나지 않았다. 냄새는 지나가던 바람이 모두 가져갔다. 이렇게 만든 똥거름을 우리는 다음해 집 텃밭에 옮겨 밭을 일구고 거기에 감자를 심었다.
하지만 세 식구의 배설물로 만들어진 거름은 턱없이 부족했다. 고추밭에는 아랫집 할머니네 소똥을 얻어와 거름을 해야 했다. 남편은 고추밭에 거름을 주면서 ‘앞으로는 똥을 더 많이 만들어 내도록 해. 남의 집에 가서 버리지 말고, 알았지?’ 하고 말해 식구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지난 여름 감자를 캐던 날, 우리 세 식구는 생전 처음 우리 손으로 양식을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이 감자는 네 똥으로 만들어진 거야’ 라고 말해주었다. 어디 감자뿐이겠는가? 고추나 배추, 당근, 토마토, 가지, 상추 같이 우리가 심은 것은 다 우리 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몸 역시 그 근원이 똥에 있고, 땅에 있다. 곧 똥은 땅이고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며 우리 몸을 지탱해주는 자양분이다.
도시에서 살 때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 몸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은 자연의 생태적 순환 속에 있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은 존재이다.
조셉 젠킨스는 인분을 퇴비로 만드는 것은 겸손의 실천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는 겸손(humble)이라는 말이 퇴비(humus)라는 말과 함께 대지(humus)라는 말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는 다시 인간(human)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똥을 살리는 일은 유기농 채소를 생산하고 환경을 살리는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배설물로 땅을 살리고 그것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한 본분을 행하는 것이다.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스스로 집을 고치고, 화장실을 지으면서 나는 이 모든 과정이 인간의 우월한 갑옷을 하나씩 벗고 겸손한 옷으로 다시 갈아입는 일임을 깨달았다. 지금은 편리한 서구의 갑옷을 입어 우리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지만 머지않아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자연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소박한 존재임을 알게 되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먹지 않고 살 수 없고, 똥을 누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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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것이 아름답다


2008년 5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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