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완규 162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 어디론가 끝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어요 도중에 지난세기 이십대 때 요절한 어느 시인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었는데 그 시인이 누구이고 어떤 이야기였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앞에서 보았을 때 분명 미소년의 형상이였는데 내가 오던 길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백발의 할아버지 였어요 그가 동서남북 방위가 불분명한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다는 어떤 계곡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농담인지도 여백인지도 모를 안개 가득한 어떤 고개를 넘어가는데 가도 가도 고개 마루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리가 아파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과 벼락이 치고 비를 뿌렸어요 비가 그치자 사방으로 천길 바위들이 나타나서 겹겹이 나를 둘러싸고 여기저기 처음 보는..

새벽

새벽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기에 내 나이 이십대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계란을 먹었어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첫닭 우는 소리와 함께 훈련소의 기상나팔이 되어 새마을 이장님의 새벽종이 되어 천방지축 댕 댕 거렸어요 동이 트는 거리에는 묘한 세상의 도래를 선전하는 입에 발린 온갖 조잡한 아포리즘을 샘플링한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도 헷갈리는 온갖 유인물이 깔리고 그제서야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은혜갚는 까치처럼 벽치기하는 기분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고 자기도취라는 이불을 덮고 나는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렇게 끝내 아침형 인간이 완성 되었어요 삼십대 초반 닥치고 가마니를 쓰고 잠시 고향에 머물렀는데 이십대의 습관이 불면증을 가져와서 새벽녘까지 뒤척이다가 깜빡 잠에 드는 순..

늦가을

늦가을 어젯밤 친구들이 남기고 간 간장통닭을 데워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이런저런 소리 들린다 더 이상 둥글둥글 원만하게 살지 말자 외로워도 슬퍼도 까칠하게 모나게 가자 어젯밤 술 취해 불쑥 찾아온 친구들에게 얼굴을 붉혔는데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구순 노모의 해소기침 소리가 내 가슴에 사각사각 가랑가랑 쌓이고 가을밤 옥상에서 들리는 의태어인지 의성어인지 모르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래 대책 없이 춥고 시린 늦가을인 게야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 남호선호사상이 유독 강한 어느 마을이 있었어요 어느 해 가을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마을의 사내아이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어요 원인도 해결책도 몰라 마을전체가 멘붕에 빠진 가운데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어요 어떤 노인은 굿을 한 판 크게 벌여야 한다고 말했고 또 어떤 노인은 이게 다 호시탐탐 동네를 넘보는 북쪽 마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어요 북쪽 마을을 운운하는 이 추론은 이 동네의 우두머리들이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사건건 북쪽 동네를 표적으로 삼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 스스로도 늘 의아해하는 하는 건 북쪽 마을에 대해 자신들 맘대로 붉은색으로 덧칠해 놓고서 스스로 경기를 일으킬 만큼 적대시하고 있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싫어하는 대상이..

草 풀이 죽었어요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는 대청마루에 마주앉아 이불 홑청에 풀을 먹이면서 풀이 죽어 말했어요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만 해도 입에 풀칠하기 벅차구나 그때부터인지도 몰라요 민초라는 단어만 들으면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건 그게 애당초 높은 분들이 만들어낸 백성들을 깔보는 상대성호칭 자신들은 난초를 치며 기와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 테니 백성들은 초가집에서 평생 풀죽어 지내라는 말 아니던가요 나훈아가 들으면 섭섭할 지 모르겠지만 잡초는 그래도 잡치는 맛이라도 있지 어쨌든 민초라고요 풀떼기만 먹고 질기게 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게 다 일반화의 오류 아닌가요 지금도 종로3가에 있는 김수영 생가터에 가면 그 싯구에 초치고 싶어져요 이게 다 죽 쒀서 ..

가을

가을 학생체벌로 꿀밤 먹이기까지는 허용하겠다는 나무나라 교육부장관의 발표가 있은 후 나무나라 교원단체들이 일제히 그 조치를 환영하는 성명을 내었고 이에 맞서 학부모단체와 일부 시민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가운데 꿀밤 먹이기는 되는데 우리는 왜 안 되나 우리도 참나무과다 참교육 가는 길에 왠 차별이냐며 너도밤나무를 선두로 한 밤나무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나무나라 거리는 온통 밤나무들이 던진 밤송이들로 뒤덮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나무들이 밤송이에 맞아 응급실로 실려가는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나무나라 대학입학시험에는 참나무속 여섯 나무를 비교 서술하라는 내용이 언제나 단골문항으로 등장했는데 이게 로또번호 여섯 자리 맞추기에 버금가는 나름 생태에 관해서는 목에 힘을 준다는 학생들도 헷..

칠년

칠년 매미울음 이토록 시끄러운 건 어쩌면 칠년 땅 속 생활을 보상받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지 어느 유명 정치인이 수년간의 검증 안 된 토굴생활을 정리하며 정계복귀를 선언하던 날 삼복의 매미 울음소리만큼이나 세찬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인내다 각고다 참을 인자 세 개다 공치사와 공염불은 중언부언 중언부언 닮아서 칠년을 자고 일어나도 언제나 Ctrl+ㅊ Ctrl+ㅍ 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제발 뼈를 깎지는 말자구요 조각미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어떤 무리수의 여인네들 빼곤 중창불사도 교회와 성당의 부흥도 집안을 일으키지도 조국을 위하지도 민족을 중흥시키지도 말자 말입니다 알고 보면 칠년간의 꿈이 너무나도 허망하고 찬란해서 일주일 동안의 현실은 이토록 시끄러운 것인지도 모르고 화살나무 잎사귀가 붉게 물 드는 건 ..

공의 무게

공의 무게 올림픽 공놀이 종목을 관장하는 구기국 왕이 공들을 모두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탁구공 배구공 축구공 농구공 등 공은 둥글둥글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모든 공들이란 공들은 부리나케 공나라 궁으로 모여들었다 먼저 왕이 자화자찬성 일장연설 끝에 공들을 불러 모은 이유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짐이 오늘 공들을 불러들인 것은 이 나라를 세우는데 이바지한 공들의 공의 크기와 무게를 측정하기 위한 것 이오 공들의 공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오늘 공신서열을 매길까 하는데 그럼 누가 먼저 말해보겠소 그제 서야 긴 하품을 참고 있던 공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든 공의 눈이 일제히 제일 만만한 탁구공에게로 쏠리자 탁구공이 마지못해 더듬더듬 말을 이었..

하여가

하여가 이방언과 정몽주의 피비린내 나는 세력 싸움에서 애먼 선죽교만 피를 보았음이야 두말하면 잔소리 일백 번은 고사하고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역사 끝내 이방언의 새로운 카르텔이 승리했다지만 어쨌든 덩굴식물의 끝판왕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히고설킨 만수산 드렁칡 추석 벌초 때만 되면 조놈의 새키들 때문에 머리가 다 지끈거려요 베어내고 걷어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랍니다 단심가는 어쨌든 고색창연한 꼴통의 향연 진토 된 백골로 머드팩 한판 피부미인으로 다시 태어나시던가 말던가 그렇다고 단심가가 하여가보다 더 양심적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정치권력은 늘 조직폭력배의 내용과 양식을 뒷북 치고 따라가기 마련이어서 조선시대 정치인들의 시가들은 죄다 코스프레의 정점을 찍고 찍어 지금은 이십일세기 그 오래된 버릇이 ..

우기 2

우기 2 안개는 언제부터인지 늘 산중턱에 걸려 있고 마르지 않는 빨래는 며칠째 요지부동 세월을 죽이고 있다 우기의 마음은 습기 먹어 무거운 나무 문짝처럼 쉬이 열릴 줄을 모르는데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거 잊지 말거라 네 키도 그렇게 쑥쑥 커간단다 아가야 가는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시대를 초월하는 노모의 혼잣말 내 키가 이 모양인 게 비를 적게 맞아서 라고요? 도대체 콩나물시루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토종 콩 재래 콩 제아무리 뛰어난 수입산 돌연변이 유전자조작 콩나물 으로도 제 키는 이제 자라지 않아요 차라리 밖에 나가 비를 쫄딱 맞고 감기나 걸려버려라고 악담을 하시지 그래요? 평소에는 잠꾸러기였지만 우기에만큼은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갔어요 그게 다 식구수보다 턱없이 부족한 우산을 선점하기 위해서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