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문화와 복지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의자 백여 개가 다 채워지지 않는다. 신춘문예 사상식 자리가 갈수록 조촐해진다. 맥박이 빨라져 있을 당선자는 물론 꽃을 들고 온 동인들도 신춘문예 시상식은 처음이었을 텐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 공연히 내가 민망했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신춘문예 시상식은 제법 북적거렸다. 심사위원들과 해당 신문 출신 문인은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이제 출발선에 선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2차, 3차 술자리까지 함께하는 젊은 문인들도 많았다. 이튿날 새벽까지 당선자의 꽃을 들고 동인들과 술집을 전전했던 것을 보면 나는 조금 쓸쓸했던 것 같다.
‘황금펜’이라..... 너희들이 동인을 결성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반갑지만은 않았다. 동인 이름도 무거웠다. 동인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나의 자의식이 발동한 것은 아니었다. 시를 전공하는(쓰겠다는 의미와 약간 다를 때도 있지만) 학생들이 전학년을 통틀어 스무 명이 조금 넘는 대학에서 예닐곱 명이 모이는 동아리가 왠지 애틋하기만 했다. (이후 생략)” 이문재, 2005년 봄호를 펴내며 中에서, 문학동네 2005년 봄호
흔히들 21세기는 문화와 복지의 시대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그 말이 국민의 정부 시절 한 때 유행했던 ‘신지식인 창조’라는 슬로건처럼 공염불로 들리는 것은 왜 일까요. 지구를 하나의 시장으로 재편한 초국적기업이 신자유주의의 깃발을 휘날리며 인간의 육체까지 식민지화하고 있는 이때, 그리하여 팔십퍼센트의 인류가 ‘능력없는 소비자’로 전락하는 이 때, 그 길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달려가는 신자유주의의 맹종자들이 떠들어대는 이 말은 무슨 두통약 광고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무수한 진통제들이 인간의 내성을 약화시켜 더 강력한 약을 찾게 만들듯 어쩌면 이 말은 인류를 문화와 복지에 대한 능력없는 소비자로 전락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한다면 과장된 생각일까요. 그래요. 그 말 앞에는 생략된 기표가 이미 존재하고 있지죠. 가벼움이라는 것, 가벼운 문화, 가벼운 복지, 어쩌면 그 가벼움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을 이미 지배하고 있기에 생략된 것일지도 모르지요. 문화나 복지 등 후기자본주의의 모든 분야는 가벼움이 지배하는 상품화의 길로 접어든지 오래일테니까요...... 정통 인문학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도 문화산업과 사회복지산업에 대한 수요와 공급은 늘어만 가고 그와 관련된 분야는 대학에서도 우후죽순 늘어만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문화와 복지를 같이 놓고 볼 수는 없고 그에 대한 전문적인 생각도 이론도 없이 하는 말이지만 말입니다.
‘복지는 높고 전문적인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요. 그리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골에서 제사를 끝내고 돌리던 음복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더욱 와닿았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서로가 복지와 문화의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소비자가 되기도 하는, 그래서 생산과 소비가 경계없이 섞여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 그게 진정한 사람살이의 형태이고 아름다운 사회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걸 허용하지 않지요. 자본주의, 더 나아가서 신자유주의가 고착화되어가는 지금은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를 긋고 대다수를 능력없는 소비자로 만들어갑니다. 문화와 복지로 한정시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생산에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상품화된 가벼운 문화와 복지에 위안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여름 한철 바캉스 다녀오듯 말입니다. 문화와 복지(정치와 경제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는 분명한 일상의 영역인데 말입니다.
속도경쟁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스템에 발목잡혀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을 향해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한 달에 한번 뮤지컬을 보여주고 프로스포츠를 관람시키고 경치좋은 펜션에서의 하룻밤을 제공하며 또는 수화기에 1004번을 돌리게 하죠. 그리고는 다시 모든 걸 잊고 속도와 경쟁의 사회로 풍덩 뛰어들라고 주문을 겁니다.
자본을 속도와 경쟁을 무슨 교주 떠받듯 떠받들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주체의 마음가짐을 믿어볼 수밖에는..... 토대에 의문 하나 달지 않고 내뱉는 문화와 복지의 시대라는 말이 공염불에 불과한 것처럼 가벼움이 지배하는 현실의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문학의 위기도 만찬가지입니다. 토대에 의문을 품고 거역할 수 있는 자세를 겸비하지 않는 문학은 ‘대중속으로’라는 슬로건을 아무리 흔들어대어도 이 사회의 가벼움에 복무하는 꼴이 되지요. 물론 그런 전철을 밟아왔지만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문화와 복지라는 말에 가벼움의 꼬리표를 걷어내고 진정함의 의미를 입힐 수는 없겠지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이 현실에서 어쩌면 진정함의 의미를 추구하는 모든 분야는 고립은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칠팔십년대 운동을 시작했던 개개인이 이념에 대한 학습을 시작할 때 한번쯤의 구속을 각오했듯이, 이혼을 결심한 여성이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의 편견을 각오하듯이 말입니다. 자발적 소수자되기와 행복한 유배자되기의 길에는 사회에 대한 의문이 우선되는 것이지 그 길에서 공간과 활동영역은 부차적인 것이니까요. 한때의 낭만과 치기가 아닌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과 결과이기에 고립은 어쩌면 대안을 꿈꾸는 자들의 몫일 겁니다.
비가 내립니다. 마음 적적하여 어디론가 말을 걸고 싶어 전문적인 지식도 생각도 없는, 정리도 안된, 구체적이지도 못한 글을 띄웁니다. 시인 김수영이 한 말을 옮기며 이만 마칠까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그 생각과 행동에 사랑이 담겨있는가 아닌가에서 오는 것이다.’
2005년 3월 22일 과천에서 황완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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