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시대가 가버렸다고 믿었던....... 얼마나 순진하고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던가. 사회구성체니 사회과학이론이니, 선배나 친구들이 묻지않아도 줄줄이 외워 삼키던 '우리들의 전성기', 그렇게 혼자서 잘난척만 하던 우리가 알고보면 눈짓으로 주고받으며 침묵의 행동을 유전인자로 쌓아가던 절대다수의 존재들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그런들 어찌하랴. 미친시대는 계속 이어져오고 아니 광폭으로 질주하는데 우리는 전성기를 지나 한 물 간 존재로 벤치신세이거늘.... 아니 세상을 향해 등돌리고 딴전을 피우고 있거늘.... 혹여 누군가가 아니 세상이 우리를 코트로 단 몇분을 불러준대도 우리에게 청춘의 순수함에 힘을 실을 백전노장의 노련함이 쌓여 있기는 한지...... 쓸쓸하다 저 한마디 '개로 태어나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 않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자유종 아래
---------김중식
가죽나무 타고 넘어 들어갔던 서대문 형무소
왜식 목조건물 사형장은 나의 놀이터였지
도르래에서 밧줄을 끌어내려 목에 걸었지
축하해, 젊음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화환花環
목의 때와 살갗과 육즙으로 엮은 비린 동아줄
미친 시대가 하필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
돌아버리지 않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던
속으로 화상火傷 입은 청춘이었으므로
유언이래야 "할 말 없다"는 것이었지, 개로
태어나더라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덜컹
발판을 열면 다리가 뜨고 혀가 나오겠지
죽을죄는 없고 죽일 벌만 있을 뿐, 발 아래
컴컴한 식욕을 날름거리는 콘크리트 지하실
나는 뛰어들었지, 귀막고 입다물며
나는 뛰어들었지, 다시는 젊지 말자고
해설/허혜정
"미친 시대"가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돌아버리지 않아서 더 돌아버릴 것 같았던" 80년대에 김중식은 완강하고 치열하게 시를 썼다. "늙은 개" 혹은 "짖지 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다는 자괴감은 실상 그의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죽을죄는 없었고 죽일 벌만 있"었던 그 시대를 김중식만큼 불온하고 위트 있게 노래했던 시인은 드물다. 별나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극적인 어조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시절이 가고(아직도 여긴 식민지라는 듯) 자유종이 힘차게 울려도 독자의 머리통에 일격을 날리는 그 까다롭고 성마른 언어는 아직도 건재하다. "다시는 젊지 말자고" 뇌까렸던 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젊고 예민하다. 떠들썩한 연애꾼과 감상과 애조의 말들이 판을 치는 시절에도, 그의 시는 독특한 호전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김중식의 시에는 늘 삶의 구체성이 물씬하도록 담겨 있고, 웃지 못할 시대의 비극과 꼿꼿한 시인의 깡다구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김중식의 시가 발휘하는 독특한 활력이다.
김중식/ 1967년 인천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데뷔, 시집 [황금빛 모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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