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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주일에 한번 배달되는 시 - 거짓말을 타전하다(안현미)

빛의 염탐꾼 2012. 9. 7. 23:02

 

 

마침표/안현미


자하문 고개를 넘어갔지요 하늘에선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나는
세검정(洗劍亭)에 도착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
지요 내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해가 뜨는 곳이고 당신이 도착해
야 하는 곳은 해가 지는 곳 해가 뜨는 곳과 해가 지는 곳 사이에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이 있지요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이죠
그녀가 맨발로 다다르고 싶어했던 천상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그가 가지 않았으나 꿰뚫어본 0시의 어둠일지도 모르는 채 그것
은 그렇게 그냥 이미 내게 도착했거나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지
도 모르지만요 아프지 말아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녔어 라고 말해
주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아픈 걸 테지요 이제 마음을 도려낸
칼을 씻고 그렇게 그냥 세검정처럼 시간을 잃어야 할 시간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테지요

 

 

오늘 배달된 안현미시인의 시중에 위의 시가 있지요. 출전을 보니 모두 '곰곰'이라는 시집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왜 표제시인 '곰곰'과 위의 시 '마침표'만 생각나고 오늘 배달된 '거짓말을 타전하다'란 시는 기억나지 않는지 그게 의문스럽네요. 내가 좀더 생활에서 건진것보다 감각과 상상력을 우선하는 시에 쏠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겠죠

 

 

어제 종로구보건소에 갈 일이 있어서 위의 시에 등장하는 자하문이니 세검정이니 하는 이정표를 보았지요. 사실 서울에 꽤 살았지만 그쪽은 거의 모르지요. 위의 시를 읽은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자하문이니 세검정이니 하는 이름들이 풍기는 맛과 그걸 사랑의 기억으로 잘 표현해낸 위의 시가 기억에 남아있어..... 볼일을 끝내고 그 이름들이 적힌 방향의 버스를 타고 무작정 한바퀴 돌았습니다. 구기터널을 지나니 불광동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예전에 불광동에 살때 터널입구의 계곡에도 몇번 갔던 기억이 새삼 나더군요. 그리고 다시 뉴턴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세검정 팻말을 보았으나.... 패스....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갈아타고 서울역에서 다시 내려 집으로 오는 버스를 갈아타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버스환승은 다섯번째 버스까지 된다는 사실..... 서울역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갈아타니... 새로운 요금이 부과되더군요. 환승이 무한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가한 오후에 배웠답니다. ㅋㅋ

 

혹시 아래시가 나오지 않으면 원문보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모두 모두 즐거운 나날 되세요. ㅋㅋ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낭송 안현미 | 201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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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시·낭송_ 안현미 -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곰곰』, 『이별의 재구성』이 있음.
 
출전_ 『곰곰』(문예중앙)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이런 시구가 꼭 들어맞는 시절이 생의 어느 한 구비에선 꼭 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지요…… 우, 우, 우, 말을 더듬으며, 가슴에 돌처럼 맺힌 말들을 간신히 시로 꺼내면서, 그렇게 겨우겨우 견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지난 후에야 알았지요. 시가 나를 치유했다는 걸. 시가 나를 삶의 쪽으로 돌려세웠다는 걸 말이에요. 하여 저는 시의 치유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이 스밉니다. 당신도 나와 비슷한 시절을 건너왔군요. 동병상련의 침묵이 우, 우, 우, 꽃잎이 되고 새가 되고 더듬이가 긴 곤충이 되고 바람이 되는 길이 보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는 지금 아픈 그대여. 고통을 견디기에 시만큼 좋은 친구도 없답니다. 시의 손을 잡고 한 시절 건널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지금은 그렇게 스스로를 믿어 보자구요. 그렇게 애절한, 처연한, 거짓말들이여 쏟아져라. 우, 우, 우우, 더듬더듬 꺼내놓은 돌덩이 같은 말들에서 거짓말 같은 진짜 세월들이 기어코 꽃필 거예요.
 
문학집배원 김선우
 

출처 : 대구노문연 ..... 그 후
글쓴이 : 감이 익을무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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