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수렵금지구역

빛의 염탐꾼 2018. 12. 5. 21:13

수렵금지구역

    

 

이 숲의 수컷들은 임금협상기간이나 해고복직투쟁 시기가 되면 비로소 늑대가 된다 먹잇감을 놓고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리다가 이빨로 물어뜯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한물간 동물서커스가 된 지 오래 되어서 요즘은 볼 기회가 드물다 철마다 벌이던 서열싸움도 언제인가부터 멀리하고 평소에는 소처럼 순하게 풀을 뜯다가 주말이면 내기골프와 내기당구를 치거나 골방에 모여앉아 이종격투기나 오래된 서부영화를 틀어놓고 점백 고스톱을 친다 패가 잘 안 풀릴 때면 나도 한때는 초원을 달리던 맹수였다는 둥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둥의 무용담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간혹 술기운을 빌려 OK목장의 결투를 제안하는 놈이 있지만 대부분 사이렌이 울리기도 전에 한바탕 멱살잡이에서 끝나고 만다 여전히 예전 버릇이 남아있는 수컷들도 있어 년중행사로 무리를 이끌고 울타리를 넘어 다른 숲으로 넘어갔다 오기도 하는데 안내견같은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돌아와서는 정선이나 태백, 혹은 마카오나 라스베가스로 원정수렵을 다녀왔다고 티브 프로 동물의 세계식 뻥을 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벌떼처럼 달려드는 부류가 있는데 모두 개미굴에 갇혔는지 그걸로 재미를 봤다는 놈은 한 놈도 보지 못했다 이 숲에서 총소리가 들리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지금은 새총소지조차 금지되었다 간혹 나이든 우두머리 수컷들 사이에서 이 숲도 한때는 화염병과 최루탄과 물대포로 시끄러웠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돌기도 하지만 대부분 틀니로 근근이 버티는 늙은 축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라 젊은 축들은 왕조시절의 개국공신이 늘어놓은 공치사거나 또는 공산권 혁명일세대들이 지껄이는 꼰대성 허풍으로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노인들의 치매성 발언으로 흘려 넘기기 마련이다 이 숲의 수컷들은 늘 전쟁을 선포하지만 날것의 냄새가 지워진지 오래여서 허공의 메아리로 울리고는 곧 사라진다 이 숲의 사전에 주먹의 용도는 가위바위보게임 한 줄로 요약되고 이전 어느 수렵시대에 집단선동연설에서 연단을 치거나 권력과 파벌다툼을 일삼던 국회라는 곳에서 망치를 두드릴 때 쓰였다고 짧게 보충 설명되어 있을 뿐 주먹다짐이나 주먹이 운다 주먹이 앞서다 같은 단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숲의 수컷들은 이빨과 발톱이 퇴화되고 입과 혀가 기형적으로 발달해서 자주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한다 상남자 짐승돌은 시들해지고 종종 모습을 바꾸어야만 해서 성형외과로 가서 얼굴에 철판깔기 시술을 마친 초식남 카멜레온이 대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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