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가족관계증명서

빛의 염탐꾼 2019. 5. 23. 16:52

가족관계증명서

    


 

뒤뜰에 매실과 앵두와 살구가 열렸다

주렁주렁 올망졸망

 

동사와 의태어에도 촌수가 있어

열리다와 달리다는

같은 배에서 나온 이음동의어

잡다와 붙들다는

떨어지다와 매달리다는 또 어떤 사이인가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고

등에 업고

손에 잡고

 

하나는 뽀대가 안 나요

한국에선 혈연 지연 학연이

경영에도 가족경영이 최고

선거판에 나오는 정치꾼의 약력처럼

무릇 가족관계증명서는

무조건 길게 가는 거야

거지꼴을 못 면해도 좋으니

금붙이 다이아 옥 비취

사돈의 팔촌, 온갖 장신구로

다시

 

주렁주렁 올망졸망

오월은 가정의 달 이잖아요


도대체 내가 너를 배고 뭘 잘못 먹었길래

생긴 게 그 모양이니

시큼한 풋살구나 풋과일을 먹었겠지요

호랑이는 꿈도 꾸지 마세요

엄마 태몽 속에 등장한 건 분명 청개구리

삐딱하고 톡 쏘는 맛이 그만 아니던가요

그게 아니라면 제 성을 갈겠어요

뭐가 그리 맘에 안 드세요

우리 사이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면

이제라도 호적에서 파버리면 그만인 걸요

목을 맨 것도 아닌데 목이 메이고

쳐다보는 눈이 많아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 간다고요

며칠 전에는 빚 때문에

일가족이 집단자살 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절대 찢어질 수 없다고

밀어냈다 당겼다

다시 밀어내고 다시 당기는

수백 번을 반복했을 그

무겁고도 가벼운 종잇조각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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