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독서일기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에 대한 이인성의 심사평

빛의 염탐꾼 2008. 8. 24. 06:54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에 대한 이인성의 심사평

 

깊이와 재미

 

 

온갖 공상과학만화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그 자체가 또하나의 공상과학만화 같은, 이 소설답지 않은 소설 [지구영웅전설]은 아무튼 재미있다. 그 재미는 우선 경쾌한 입심과 다양한 지식,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 보는 시선으로부터 나온다. 단선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재미의 무기들을 잘 활용하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더구나, 그 재미를 가지고 겨냥하는 문제의식도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의 배후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가, 세계문화를 조정하려는 자본주의는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 인종적 열등의식은 미국식 제국주의에 어떻게 조성되는가 등등, 흥미로운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답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도식적이라는 것은 이 작품의 치명적 약점이다. 재미있게 읽고 나서 보니 우리도 짐작하고 있던 뻔한 결론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내가 보는 관점에서의) '진짜'문학과 '가짜'문학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또한, 형식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파격이 겉멋처럼 남용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어떤 형식적 실험이든 필연적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읽히지 않는다. 만화를 흉내내면서 만화를 전복시키려는 의도일까, 자분해 봐도 석연치 않다. 문학도 하나의 문화적 제도이다. 스스로 고착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려는 움직이는 제도이긴 하지만, 그 변화에도 필연적 정당성에 존재해야 한다.

여러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덩하는 데 동의했다. 이런 의구심들 너머로, 적어도 자기체험(이 작가에겐, 만화체험)에 천착하여 자기 식의 어떤 허구공간을 만들어보겠다는 젊은 열정만은 분명히 느껴진 탓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을 역설적 가능성으로 읽고 있으며, 앞으로 이 작품을 뛰어넘을 다음 작품이 나오리라는 기대에 기대어 그렇게 결정했다는 점을, 새로 세상에 나서는 이 신인작가에게 분명히 전하고 싶다. 이 작가가, 문학의 이름에 값하기 위해서는 선명한 재미보다 불투명해도 참으로 우리속을 온통 뒤집어엎는 깊이가 필요하다는 내 의중을 기억해주면 고맙겠다. 물론,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당선에 대한 내 축하의 마음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