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독서일기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

빛의 염탐꾼 2009. 12. 10. 10:26

과천에서 용인까지 출퇴근시 버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심심풀이 소설책을 빌려서 보기로 했다. 그 첫번째가 김영하의 [퀴즈쇼]였고 이번이 두번째,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 강남까지 가서 용인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갈아타고 25분정도의 시간과 퇴근시 용인에서 강남 50분, 아니면 영통에서 과천까지 40분, 짬짬이 읽었다. 문학평론가 류보선이 쓴 심사평을 보면

 

농담의 역사, 혹은 역사적 농담

 

박진규씨의 [수상한 식모들]은 무엇보다 경쾌한 발상이 눈에 띄는 소설이었다. 여기, 신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복종을, 또는 남자들이 요구하는 모럴을 그대로 수용하여 여자가 된 곰이 있다. 권위적인 남성들은 순종적인 여성을 알리바이 삼아 남성들을 위한 로고스를 만들었고, 이 남성들과 남근달린 여성들은 자신들의 로고스에 위배되는 계층이나 욕망, 염원들을 억압하며 역사를 지배해왔다. 그런데, 여기, 또 신의 복종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여성이 된 호랑이가 있다. 그 호랑아낙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성들의 거대한 억압체계와 맞서왔다. 이 호랑아낙의 후예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수상한 식모들'이다. 그녀들은 견고한 질서를 유지하는 가정으로 잠입해서 그녀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시스템과 적극적으로 투쟁한다. 그녀들은 남편들을 유혹하고 어린아이 귀에는 쥐를 집어넣어 그 아이들의 초자아를 약화시켜 그들을 백일몽의 상태로 살도록 한다. 남성들과 남근 달린 여성이 결탁해 만든 가정을 균열시키는 것이야말로 오랜 역사를 통해 고착된 남성 중심적인 질서, 또는 로고스 중심주의적 질서를 해체시키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란 믿는 까닭이다. 이를 통해 [수상한 식모들]은 말한다. 혹시 자신의 몸이, 가정이 정상적이지 않다면 '수상한 식모'를 의심해보라. 아니, '수상한 식모'가 잠행할 정도로 금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반성해보라. 이것이 바로 [수상한 식모들]의 발상법이고 역사지리지이다. 이 얼마나 발칙한 상상인가. 또 얼마나 유쾌한 농담인가. 그리고 또 우리가 애지중지 모시고 있는 역사상에 대한 얼마나 신랄한 풍자인가. 한마디로 [수상한 식모들]은 호랑이도 자기 스스로 여자가 되었다는 유쾌한 상상 하나로 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오던 남근 중심주의적이고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사회 모럴의 허구성과 억압적 성격을 여지없이 묘파해낸 소설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담론을 의심하고 탈영토화하려는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하나의 쾌거라 할 만하다. [수상한 식모들]로 인하여 우리 소설사도 이제 농담의 역사, 혹은 역사적 농담이라는 희귀한 변종을 갖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수상한 식모들]이 '호랑아낙'에서 '수상한 식모들'로 이어지는 탈영토화된 여성상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수상한 식모들]은 두개의 축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구성되고 있다. 하나는 수상한 욕망들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조직의 현대적 후예인 '수상한 식모'에게 복수를 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중 [수상한 식모들]이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후자이다. 여기, '수상한 식모'에게 복수를 당한 한 가족이 있다. 이들은 어느 날부터 '수상한 식모'의 복수 때문에 대타자의 권위를 거부하고 수상한 욕망들을 지닌채 살아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하녀 혹은 식모에 대한 백일몽적 환상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작중화자인 경호와 형은 식모가 귀에 집어넣은 쥐 때문에 도대체가 자신만의 유쾌한 놀이에 빠져 있을 뿐 현실원칙을 준수하질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 가족은 내내 현실적인 질서로부터 비난받고 배제되는 고통을 경험한다. 하지만 [수상한 식모들]은 이들의 고통을 오히려 통쾌하고 유쾌한 것으로 그려낸다. [수상한 식모들]은 이들의 유쾌한 고통, 고통스러운 유쾌를 통해 대타자에 예속된 삶이 얼마나 자기가 없는 삶인가를 통렬하게 제시한다. [수상한 식모들]에 따르면 현존재들이란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스스로 부정하며 살아가는 욕망없는 기계일 뿐이다.

[수상한 식모들]은 이처럼 유쾌하고 발칙한 상상을 통하여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사상을 발명해내고 있는 문제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경쾌하고 유쾌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었을까, [수상한 식모들]에는 종종 치기 어린 발상과 표현법이 자주 눈에 띄었다. 또 가상의 역사를 통해 실제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맥락화나 식견 같은 것이 미약한 듯이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상한 식모들]은 앞서 언급했듯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작가의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적인 결과인지를 판별하기 쉽지 않았다. [수상한 식모들]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수상한 식모들]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문학동네소설상이 작품을 보고 뽑는 것이지 작가를 보고 뽑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돌이켜보니 한 작가, 또는 한 작품의 내적 모순은 한계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작품의 긴장을 유발시키고 밀도를 유지시키는 힘이며, 그러한 모순을 병합하여 새로운 지양을 향해 가는 작품만 이 다음의 작품을, 그것도 문제적인 작품을 불러온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디 더 밀도 있는 작품으로 이 우려가 쓸데없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길......

 

이 작가가 단지 기발한 상상력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와의 인터뷰에서 들어난다. 대학교때부터 희곡을(공무도하가에서 영감을 얻은 [그 남자? 빠져 죽었어]와 마요네즈, 케첩, 간장 등이 등장하는 [소스야, 소스야, 뭐 하니?])을 쓴 기본기가 탄탄한.... 소설속의 주인공을 비만으로 설정한 것을 묻는것에 대해 '비만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무도 비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비만은 아이러니다'라고 대답한 것과 [수상한 식모들]이 갖고 있는 전복적 상상력에 대해서 '곰의 시대를 뒤엎고 진정한 호랑이의 시대가 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호랑이의 시대가 이뤄지는 순간, 호랑이의 시대는 부패하기 시작한다. 어떤 꿈이든 굳어지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 같다'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그가 기발한 상상력에만 의지하여 글을 써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구강만이 아니라 안구에도 메가폰을 설치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제 이미지들은 조작되고 왜곡되지만 아름다운 곡선을 지니게 된다. 김완선의 [가장무도회] 가사처럼 진실은 회색 빌딩 사이로 숨어버린 지 오래다. 부는 순결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자정의 파티에 참가하고 혁명은 리바이스 청바지의 상표처럼 소비된다. 착취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자선사업 프로그램 선글라스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수상한 식모들] 108페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