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대왕금강송과 마주하다 - 영남일보 2012. 4. 20 이춘호기자
영남일보 주말섹션팀、 언론 사상 첫 탐방·공개
나무?
아니다. 고매한 인격체였다. 사생결단의 고고한 구도자가 소나무로 환생한 뒤 장구한 세월 조탁해나간 하나의 ‘절벽정신(絶壁精神)’.
밋밋한 심산유곡은 성에 차지 않았다. 스스로 사지(死地)로 유폐시켰다. 속세와의 인연도 멀었다. 백두대간 울진군 서면의 한 정상부
바람능선. 철옹성의 기세로 독좌(獨坐)하고 있었다. 최악의 유배지. 미사여구(美辭麗句)의 미학도 버렸다. 추사체처럼 고졸질박한
품새를 향해 스스로 제 사지를 찢고 잘라냈다. 암울한 형극의 시간을 달게 삼켰다. 차돌보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한 성정(性情)으로
비상했다. 세월의 기척을 아는 현자에게만 제 몸을 살포시 보여주었다.
백두산 호랑이 같은, 백두대간의 대표 소나무로 군림하는 ‘울진 대왕금강송(이하 대왕송)’을 만나고 싶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한 임도의 초입. 차량으로 30여분 이동했고, 다시 거기서 1시간10분여를 걸어서 도착한 곳. 천년 묵은
용소(龍沼), 아니 천수 관세음보살상처럼 서 있는 ‘대왕송’을 생애 처음으로 친견(親見)했다. 4월8일 오전 11시. 마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알피니스트 같았다.
천의무봉의 소나무 앞에 서는 순간.
기자는 ‘실어증(失語症)’에 걸려버렸다. 절대적이고 숭고한 아름다움은 ‘불립문자’. 언어의 한계를 절감했다.
목탑 같았다. 합장을 하고 배례를 했다. 모두 말을 잊고 고유제 준비를 했다. 태풍 때보다 더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백두대간을 붕괴시킬 듯한 기세였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게 바로 ‘신성(神聖)’아닐까.
땅이 키운 게 아니었다.
세월이 빚은 듯했다.
하늘이 엄선한 눈·비바람, 벼락과 천둥, 햇살과 별·달빛이 투입돼 발효시킨 ‘신송(神松)’이었다. ‘국송(國松)’이라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절묘(絶妙)의 한자를 ‘절묘(折妙)’로 고치고 싶었다. 꺾어지고 굽어지고 휘어짐의 묘미가 한 몸에 응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왕송은 여느 소나무와 격이 달랐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꼭대기에 있어 더욱 신령스러웠다. 구불구불 똬리를 트는 여느 소나무는
절묘한 ‘곡선미학’만 보여주지만 대왕송에게 그건 조족지혈. 소나무의 기상이 어디까지 웅혼하게 진화할 수 있는가, 그 끝을 열어
보여주었다.
아직 그는 베일에 가려 있다. 주민들도 잘 모르고 산림청 직원들도 극소수만 그 존재를 알고 있다. 거기로 가는 탐방로가 정비되지 않아 전문 가이드가 없으면 볼 수 없다.
위클리포유는 몇 차례 고민을 했다.
대왕송을 지면에 소개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그 존엄함과 장생불사를 위해선 한정적으로 공개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가는 길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이번주는 울진 대왕송 등 현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거론되고 있는 금강송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왕금강송은 사진작가 장국현씨가 명명한 것.
장씨는 “산림청 지정 왕소나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경이로운 자태를 간직해서 ‘대왕’이란 말을 붙였다”고 말했다.
해발 800m. 서쪽은 절벽. 능선에는 시도때도 없이 돌풍이 불고, 뿌리는 암반 위에 서 있다. 20여개의 굵은 가지 모두
하나같이 용틀임해 형형해 보인다. 맨 아래 굽어진 가지는 바람에 수십만번 스쳐 송진이 흘러내려 특이하게도 원형의 연리지가 됐다.
수고는 12m, 둘레는 5m. 껍질도 희귀하게 거북 등처럼 육각형, 몸둥이 전체가 붉은 톤. 그래서 천하 제일의 금강송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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