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문학

고아의 말 - 이제니

빛의 염탐꾼 2015. 4. 16. 13:30

고아의 말/이제니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

 

늙고 병들고 지친 마음이 내 얼굴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게 합니다

어둠속에서 써내려간 글자들을 읽으려고 종이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종이의 질감을 만져보았습니다

 

종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심장은 손가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아름다운 도형들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뾰족한 것들이 나를 위무한다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반의 반의 반으로 나눠지는 것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나에게 나를 보여주지 마세요

거울과 거울과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나는 달렸습니다

 

먹이를 손수 구하고

담요와 네, 담요와

따뜻한 담요와 네, 따뜻한 담요와

 

그 짧은 손 중에서 어미의 손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내 손이 어미의 손에게로 가닿기를

소용없는 말이 고아의 해변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손을 잃으면 발이 손이 됩니다

발을 잃으면 손이 발이 됩니다

손발을 다 잃으면 손발 없는 것들의 그 깊은 고독에게로

 

바다는 깊습니다

바다는 깊고 넓습니다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넘실대고

고아의 말과 한 몸으로 넘실대고

바다는, 고아의 해변은, 매순간 다른 리듬으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

 

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더 큰 진폭으로 울고 있습니다

텅 빈 조개껍데기에서 소리없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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