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빛의 염탐꾼 2018. 3. 27. 12:06

 

 

북해도 구시로발 삿포르행 열차

삿포르공항이 있는 미나미치토세역

승차권을 가지고 내 옆 자리를 앉은

여드름 채 가시지 않은 앳띤 소년은

앉자 마자 책을 펼치더니 그것도 잠시

테이블에 머리를 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고등학생은 되었을라나 잠시 후

깨어나더니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더니 다시 돌아오기를

몇 차례 물론 그럴 때마다 나에게

꼬박꼬박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한다

나한테 뭐가 미안할까 내 기준으로

보면 일본의 인사문화는 어쩐지 인간본능을

넘어선 구석이 없지 않은 듯도 한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몇 차례 터널을

지나고 흘깃흘깃 옆을 쳐다보니 소년은

기대반 불안반의 표정을 하고 면접답안과

자기소개서를 읽고 있다 그리고 소년의

손에 들린 열차표 세 장,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도 두번의 열차를 더 갈아탈 모양이다

모든 길에도 표정이 있다면 갈림길은

분명 저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미나미치토세역에서 두개의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소년은 내리고 나는

한참동안 소년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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