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우물 같은

빛의 염탐꾼 2019. 1. 25. 15:28

우물 같은

 

 

 

경찰서 게시판 현상수배 전단지에는 여성들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다

마음에 품는 미움도 죄가 되어서 다들 조금씩 다르지만

여성들의 몸에는 몇 범씩의 전과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그 모든 기록은 남자들이

덮어씌운 가문의 영광, 또 다른 이름은

깊고 고요한 누명


세상의 모든 남자와 어미들은 저를 평생 죄인 취급 했어요 아니요 저도 공범 이예요 평생 한 우물을 팠더니 내 볼에 우물 같은 보조개가 생겨났어요 백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 그건 절대 웃음이 아니예요 동아줄에 매달린 두레박으로 날마다 길어 올린 것은 편견과 차별, 언제나 조롱과 멸시가 쏟아졌어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메꿔버리고 싶어요 우물 앞에 서면 늘


목이 타고

목이 메이는

마음이 우물 같다는 건

파도와 격랑이 솟아나는 불안과 우울의 감옥

나는 우물에서 태어나 우물가에 홀로 버려진 아이

 

우물아 우물아

 

이 세상에서 누가 죄를 제일 많이 지었니?

여기에서 백마 탄 왕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열두시가 되면 한 쪽 구두를 벗어던지고 우물로 돌진하세요!


그들은 오늘도 우물로 간다

 

징검다리 같은 열녀문과 열녀비를

뒤뚱뒤뚱 밟고서 뱀처럼 또아리 튼

금 간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아기를 남편을 어미를 아비를 동생들을

들쳐 매고 혹은 밧줄을

목에

걸고

 

고해성사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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