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어느 노동자 이야기

빛의 염탐꾼 2008. 8. 24. 19:51

어느 노동자 이야기

-우화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빌려

 

 

그는 말이 없었다 얄팍한 입술로 상대방을 꼬시지도 않았고 남들 앞에서 큰 소리 칠줄도 몰랐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무섭게 큰 공장에 들어가 묵묵히 일했다 사장이 "지금은 게으름을 피울 때가 아니다"라고 훈시할 땐 더 열심히 일했꼬 "근로자는 무지몽매하고 게으른 것이 천성"이라고 목청을 높여도 고개 흔들지 않았다 "저 사람 왜 저리 앞뒤가 꽉 막혔어"라고 동료들이 손가락질 할 때도 기계 앞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한달에 한번 동생 학비를 고향에 송금하기 위해 우체국에 들렀꼬 명절 때는 몇 개씩의 선물꾸러미를 챙겼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공장 한켠에서 꽃들이 어우러져 피고 지는 몇 해 동안 그는 그렇게 살았다 아무 탈없이

 

(나와 소가 무엇이 다른가 굵은 팔뚝, 두툼한 손, 오직 기계 앞에 묵묵히 서 있는 다는 등심, 안심, 근수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한국산 토종 한우와 무엇이 다른가)

 

사장은 늘 그랬다 평소에는 게으르다고 고삐를 늦추지 않다가도 임금인상이나 단체협상 기간만 되면 "우리는 한가족입니다 운명공동체로서 서로에게 부끄러운 일은 절대 없도록 합시다"라는 요지의 일장연설을 했다 사장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는 날 점심 식단에는 어김없이 진한 고깃국이 오르고 공장은 또다시 돌아갔다

 

(평소에는 소인 나는 매월 초하루나 임금협상 기간에만 환골탈태되어 사람이 되는 것인가 사람이었던 나를 소로 내 모는 자 누구인가 조장인가 반장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사람같이 살고 싶다 사장이 우리에게 먹지 말라는 것은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먹으면 모두가 끝장난다는 '무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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