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을 이틀 앞둔 2월 2일 용담산을 올랐다. 뭐 대단한 민족의식을 가진놈도 아닌데 갑자기 용담산 고구려 토성위를 걷고 싶었다. '외국에 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요즘들어 조금씩 실감이 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독도문제 등이 뭐 그리 피부깊숙히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중국, 그것도 길림이라는, 조선족으로 통칭되는 동포들이 거대한 한족들 틈새에서 살아가는 조금은 독특한 지역에서, 가끔씩 그들과 섞이다 보면 나도 모글게 민족(?)이라는 애매모호한 존재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고구려유적이 있는 용담산 입구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사실 동북에 있는 역사학자들은 관여하지 않는 것 같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밀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으로 고구려문제에 대한 언급은 한족과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뿌리를 둔 조선족들과의 대화에서도 민감한 문제일뿐만 아니라 입장 또한 같은 조선족이라도 다들 달라서 왠만하면 피해가기 일쑤다. 그렇다고 그게 어디 완전히 묻혀버릴 문제이던가, 안주거리로나마 도마위로 올라올 때가 가끔은 있다. 한족 역사학과 대학원생들과 수업을 같이 받은적이 있었는데 여학생 하나가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우기길래.... 그냥 그려려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몇일 전 조선족 형님들과 술자리에서 그 얘기가 나왔을 때는 적극적으로 내 논리를 설명했지만, 어쩌라.... 다른 국적이 갖다주는 오묘한 차이, 마지막은 언제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참 답답하지만.....
흔적으로 남은 고구려토성.... 좌우의 높이 차이를 보면 토성임을 짐작케하고 용담산 등산길은 토성위로 쭉 이어진다.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조선족 중에도 저마다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의 목구멍을 쥐고 있는 직업과 위치에 따라 미세한 입장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싶기도 하지만.... 나도 팔이 안으로 굽는 인간이라서 가끔은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자영업자와 교수들이 조금은 민족적 관점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과는 달리 공무원(공무원이면서 당원이면 그 강도가 더한것은 물론이거니와)들은 중국측 동북공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몇일 전 당원이기도 조선족형님(물론 간부급공무원이다)은 "한국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고'" "최근 들어와서 고구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학교에서도 고구려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지 않느냐"며 얘기할때는 '정말이지 이건 아닌데' 싶었다.
정말이지 이건 아닌데.....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그많은 민족들..... 역사가 기록되면서부터 중국쪽에서 동이(东夷)라고 불렀던... 예맥, 선비, 말갈, 돌궐, 거란, 여진, 만주.... 새로 찾아보지 않고도 내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이름들, 그 많던 민족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보면 한족(汉族)이라는 정체만큼 애매모호한 개념도 없을 듯하다. 한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심하는 적지않는 중국인들이 존재하고 있는것을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역사학과 수업을 받으면서 조선족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던 사실에 따르면 지금의 안휘, 강소, 산동 지방조차도 진시황의 중원통일 이후에서야 비로소 한족의 범위에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면 동북에서 태동한 선비족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수나라와 당나라를 건설하면서 자연스레 한족의 개념안에 들어갔으리라. 중원으로 진출하여 중국을 통일한 만주족 또한 한족에 동화되면서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인구의 93%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많던 고대와 중세기의 동북의 민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旱牢, 마른우리(감옥)저 정도로 해석되는 고구려유적
화강암섬돌로 쌓은 진지로 직경 16.6미터 깊이 3미터의 원형의 고구려 유적이다. 건축법은 용담산의 또다른 유적(저수지와 비슷)과 같아 동일한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나 절대로 물이 차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이전에는 범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추정하였으나 발굴결과 그러한 증거물이 없는 점으로 봐서 군수물자를 저장하는 지하실로 추정하고 있다.
내가 아는 조선족교수가 쓴 조선역사의 시말(시작과 끝)에서 그는 고구려에 대해서 이렇에 상술하고 있다. 중국어로 된 글을 어줍잖은 실력으로 번역해보면
"고구려는 지금까지 중외(중국과 해외)역사학계(범문란, 전백찬 등 중국의 권위있는 학자를 포함하여)에서는 조선의 고대국가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80년대에 시작, 중국사학계에서 갑자기 고구려 귀속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 그 관점은 고구려는 조선의 고대국가가 아니라 중국경내의 소수민족지방정권의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지금의 중국영토안에서 발흥하여 나중에 조선반도로 건너간 것이며 장기간 수당과 조공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여전히 국외의 사학계에서는 고구려를 조선의 고대국가로 인정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용담산의 오래된 우물, 깊이 10여미터에 이르는데 지금도 식수로 이용되고 있었다.
용담고정이라고 적힌 표지석
역사의 진실이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감히 결론내릴 수는 없겠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관점이란 속이 보이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새로운 물질적, 이론적발견과 철학인식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언제나 돌연히 나타나는 것은 모종의 정치적인 색책를 뛴 것임에 틀림없다.
고구려의 귀속문제가 경제위기의 이 암울한 현실에서 뭐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중국의 동북에서 명멸해간 지금은 역사책의 한구절로만 남아있는 그 많은 민족의 이름들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한낱 고구려라는 이름을 넘어 전체 한반도의 흥망과도 연결될 수 있기에 그리 쉽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는 여전히 두동강이로 갈라져 있는 입장이고 보면, 더욱이 고구려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땅에는 한민족의 또하나의 국가가 버팅기고 있은 상황에서는.....
도교사원의 도사가 내가 한국인같아 보여서인지 저쪽이 고구려왕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용담산 도교사원
용담산 불교사원, 건축형식이 도교사원과는 다르다고 설명해주었는데 잊어버렸다.
용담산 또하나의 고구려유적, 水库(저수지)수리기, 1995년에 길림시인민정부에서 투자하여 대수리를 했었는데 물을 빼고 2600입방미터의 진흙을 파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수지 전경
돌아오는 길, 길림대교 아래로 요몇일 따뜻해서인지 아니면 입춘이 가까워오기때문인지 유빙이 흘러간다. 그렇게 길고 긴 길림의 겨울도 끝이 보이는 것일까..... 삼동에 차갑게 얼어붙었던 단단한 얼음들이 조각나서 흘러가는 유빙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된 전체가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님을 느껴보았다.
다양성과 평화, 말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도저히 결합되기 어려운, 겉으로는 세계의 모든 나라의 모든 지도자가 입에 달고 사는 단어지만 실제적으로는 점점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하나의 큰 얼음덩어리를 모의하는......
그래도 언제가 봄은 올 것이다..... 제본모습대로 제갈길로 나뉘어서도 평화롭게 흘러가는 저 유빙처럼.....
송화강 유빙
* 제목은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패러디하였는데, '싱아'라는 부분에 '소수민족'이라는 단어만 끼워넣을까 하다가 너무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냄새가 나서 그만두었다.
2009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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