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 길림시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의 개교 60주년 기념식 공연장면들, 길림시는 외곽 농촌인구를 포함하면 400만, 시내인구가 200만쯤 되는 중국의 중소도시로 면적은 한국의 충청북도 정도이고 조선족의 인구는 6만정도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과 기타 다른 중국의 연해 도시로 돈벌러 떠나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호구가 아직 길림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여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고 있다. 어디를 가나 유치원생들의 율동은 한결같다. 귀엽고 깜찍하고 발랄하다. 저들이 성인이 될 쯤이면 중국 동북의 조선족의 정체성은 거의 희미해져 갈 것이다.
전통은 언제나 전근대적이다. 중국 조선족의 형태도 많이 다양화되어 거의 한족(중국의 주류라고 우기는)에 동화된 쪽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위해 몸부림치는 쪽으로 크게 나뉘는 것 같다. 언어구사와 식생활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차이도 개인마다 확연히 갈라지는데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은 세계 여느곳이나 다름바가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 그런것은 아니어서 가족의 내력과 개인의 민족의식 차이에서 오는 별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집안의 교육이고 학교의 교육인 것 같다. 조선족학교를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는 엄중하고 같은 조선족 학교를 좁업하였다 하여도 자신의 자녀를 조선족학교에 보낸 쪽과 한족(중국의 주류라고 우기는)학교에 보낸 쪽의 차이도 엄연하다. 자식의 장래를 위한 선택이라서 고민이 많을 듯도 하고 자신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살아온 내력이 닮겨있어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일 듯도 하여 나 또한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쉽게 어느쪽에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전통은 언제나 전 근대적이다. 그렇다. 80년대까지 민족의식이 강한 동북의 조선족들(연변지구도 마찬가지)의 생활문화가 북한에 가까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물론 중국색도 그 위에 덧칠되었지만) 그런데 2009년 현재 적지않은 조선족들의 생활문화는 한국적으로 변했다. 한국 TV시청이 주도하는 이 현상은 의식주와 연관된 많은 부분을 넘어 노래방으로 대표되는 학국노래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들의 피부 깊숙히 스며들어있다. 단지 한쪽영역, 두번의 단오제를 길림에서 보고 오늘 조선족중학교의 기념공연까지.....
변하지 않은건 전통춤, 물론 사물놀이와 부채춤, 그리고 한국식 농악이 가끔 등장하기도 하지만 무슨 기념식장을 수놓는 전통공연의 대표는 아직까지 최승희류의 춤이다. 그것도 최승희가 북한으로 가서 만들었다는 물동이춤을 비롯한 북한식 춤, 그건 아직 거뜬하게 살아있다. 그렇게 전통이라는 이름은 늘 전근대적이다.
최승희(崔承喜)의 생몰(生沒)이 정확히 알려진 것은 2003년 초 북한 TV가 애국열사릉에 있는 그의 묘비화면을 보도하면서였다. 묘비에는 ‘1911년 11월 24일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 쓰여 있었다. 최승희를 무용으로 이끈 것은 16세에 처음 접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서울공연이었다. 이시이를 따라 도일, 문하생으로 3년간 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최승희는 1930년 서울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갖고 한국 현대무용의 태동을 알렸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최절정기를 그곳에서 맞아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해외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뤄 그에게 ‘동양의 진주’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유럽·남미 등 각국을 순회하며 마사 그레이엄과는 합동공연을 했고 찰리 채플린, 피카소, 장 콕토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41년 말부터 광복 때까지 계속된 일본군 위문공연은 그에게 낙인 같은 ‘친일’ 딱지를 붙여주었고 이후 그는 남북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친일 전력은 그를 월북으로 내몰았고, 북한 역시 그를 한때 인민배우로 이용하다 반혁명예술가로 몰았다.
사실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가인 남편 안막을 따라 북한으로 간 최승희의 초기는 승승장구했으리라. 그의 유명세가 한동안 '친일청산'이라는 절대절명의 낙인을 덮어버릴 정도였으니까. 아직까지 남아있는 조선족이나 조총련계 민족춤이 그 시절에 탄생되었으리라. 그러나 괘도이탈된 사회주의의 질주,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광기가 북한을 비켜갈리 만무했을 터.... 대약진이니 총력이나 하는 로봇언어를 내세운 기계화에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사상도 예술도 전을 접어야 했으리라. 그렇게 최소한의 민족형식을 담은 그의 춤 또한 서둘러 발을 뺐을 것이다.
많이 엷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최승희류의 춤과 노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북한 아가씨들의 축하공연이다. 같은 민족이라고 이런 장소에 초대되고 그것이 이들의 정체성을 아직은 유지시키고 있는 듯하다. 길림에 있는 북한식당 용악산의 두 아가씨, 어쨌든 그들은 즐겨운 듯 하다.
올 삼월에 평양에 있는 전문대학을 막 졸업하고 길림으로 건너왔다는 이 아가씨가 부른 노래는 북한의 전통민요였는데 전통민요는 아직 남과 북의 차이가 크지 않은 듯 하다.
북한식 한복을 입은 유치원생들의 놀이가 유쾌하다. 이들이 성인이 되면 과연 이 학교가 존재할 것인가. 아니 존재한다고 하여도 민족은 그저 형식으로만 포장되고(그저 대학입학시에 주어지는 몇점의 가산점을 받기위한) 아무런 내용도 남아있지 않은 빈껍데기같은 조선족학교가 되지는 않을까?
올해 하나뿐인 아들을 이 학교에 보내 놓고, 아들의 조선어가 늘지 않는다고 늘 고민하는 이 형님 또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들의 실력을 고민하는 이 형님의 말 속에 조선족학교의 현실이 보인다. 아마 조선어 시간만 조선어를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과 휴식때는 중국어를 입에 달고 있을 것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조선족중학교 근처의 식당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말속에 조선어가 가끔 들리는 것을 보면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그나 저다 다 헛것일 수도 있다. 세월과 시간 앞에 장사는 없으니까.
어디나 학부모들의 축하공연은 현실이다. 기념공연이 철지난 옛노래와 다짐같은 춤을 선보이지만 학부모들의 춤과 노래는 오늘을 바로 전한다. 중국노래와 한국노래가 반반씩 섞인 그들 속에 조선족의 오늘이 있다.
서울에 있는 중앙대학교에서 이 먼곳까지 교생실습을 나왔다는 학생의 인사말과 노래를 들으며 자리를 떠났다. 유람을 겸한 사회인식연마를 위한 것치고는 꽤 멀리 날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얻어가는게 있었으면 하고 바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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