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산을 오른다. 백암한화콘도 뒤를 돌아 정봉을 향해, 순전히 이놈들을 만나기 위해서
날씨가 잔뜩 흐려, 가스가 사방을 감싸니 금강소나무의 쭉쭉 뻗은 위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내 감히 말하건데, 백암한화콘도 뒤쪽,백암산 정봉능선에 펼쳐진 금강송은 일품이다.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하는 울진 소광리 금강송군락보다(참고로 소광리 금강송 숲은 두어번 가본적이 있다) 치밀도와 밀집도에서 앞선다. 혹자는 소광리 금강송군락에 가면 400-500년된 금강송도 있다고,,,,, 그러면 난 당연히 되받아칠 것이다. 백암산성에서 백암폭포까지의 길과 백암산 주둥산로에서도 아주 오래된 금강송 거목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고....
금강소나무, 미인송, 적송, 황장목, 춘양목 등 그 이름만해도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그렇게 한반도에서 금강과 미인은 동의어이다. 뜻을 풀이하자면 '한국적인 아름다움' 뭐 그쯤.... 적송은 일반소나무와 달리 수피가 붉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황장목 또한 그럴 것이다. 예전 나라에서 질좋은 소나무 단지에 일반인들의 벌목을 막기위해 황장봉산을 설치하고 항장봉표를 바위에 새겨 넣었다(서면 소광리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나무의 쓰임새에 맞추어 율목봉산(밤나무), 진목봉산(참나무)등이 있었다) 춘양목이란 이름은 봉화군 춘양역에서 금강송을 실어날렸다는데서 비롯된 이름이고(춘양역이 원래의 노선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갔다해서 '억지춘양'이란 말도 생겨났단다. 춘양은 내가 고향에서 살때 가끔 만났던 '해동'이란 친구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놈은 아직 거기에 살고 있을까?)
선시골 갈림길, 여기만 서면 내려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몇초간 갈등, 그러나 1시가 넘어 시작한 산행, 사방이 안개천지인 오늘은 아니다. 아니다..... 다음으로 패스,,,, 예전 혼자서 이길을 내러가다 된통 당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친구와 같이 한번 더 내려갔었다... 혼자서는 왠만하면 참아야 하느니라....
백암산 정상, 1004미터, 안개로 인해 동서남북조차 구별이 안된다. 그냥 하산
흰바위 쪽도 마찬가지,,,,,,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백암산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는 흰바위.... 그러나 좀처럼 그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직선의 바위벼랑이 아찔하다. 흰바위 능선의 직선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는 덕인1리 덕거리에서 덕인2리 가는 산길, 그곳에서 보면 백암산 정상부에 킬로 잘라낸 듯한 곳이 보인다. 그곳이 흰바위...
백암산성의 푯말, 신라시대의 장군이름과 공민왕과 모르시골의 이름들이 보인다. 모르시골의 유래가 꽤 재미있다....
백암산성,,,, 의 흔적,,,
위에서본 백암폭포,,, 폭포다운 위용이 보이지 않는건.... 장마도 비켜간 울진의 가뭄탓이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른다... 아쉽다... 참고로 백암폭포에서 백암산성 오르는길은 목제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음날 서화산(어릴적 서해산으로 불렀다. 어떤 게 정확한 명칭인지는 모르지만 소태리와 선구1,2리(안마, 문골)을 가르는 산으로 높이는 400(?)미터 정도)을 오른다. 서화산에 있는 자연습지와 그옛날 공수부대가 주둔했던 터를 보기 위해서....가는길에 송이채취지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런 푯말이 보이면 가을날엔 왠만하면 출입을 안하는게 좋다. 오해를 사기에 안성맞춤이므로... 그러나 몰래,,, 벌초를 아니면 성묘를 핑계로 송이플 땄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이고장 출신이라면.... 한두번쯤은...
서화산 정상부에서 문골쪽으로 십여분가면 나타나는 습지,,,,,역시 가뭄으로 물이 말라서 습지다운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릴때는 몰랐지만 철나고 이곳에 오면 언제난 물이 몇갈래를 이루어 질척한 땅을 연출하고 있었든데.... 울산 정족산의 무제치늪이나 양구 대암산 용늪 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눈에는 엄연히 습지로 보이는 사랑스런 곳이다.
습지이기에 물이 풍부하였고, 그래서 이곳엔 한 2년간 공수부대가 주둔했었다. 공수부대의 막사로 보이는 흔적들이 곳곳서 발견된다. 1969에서 72전후의 2년 남짓(확실한 년도는 모르겠다) 이곳엔 공수부대 들이 주둔했고. 우리마을에도 군인들이 곁(접)방살이(새들어 사는 것을 의미)을 했단다. 군인과 결혼한 마을 누나들도 있었고 우리들 초등학교 여름방학 숙제에 곤충재칩, 식물채집과 함깨 어김없이 등장하던 스크랩(각종 사진들을 오려 붙이는것)이 있었는데 그때 군사잡지에서 오려붙어서 선생님께 칭찬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걸로 보아선 우리집 뒷방에도 군인들이 살았을 것이다. 최신전투기의 비행모습과 탱크 사진들이 담겨진 잡지들은 그들이 남겨두고 갔던 것이리라.
추측하건대 아마 울진,삼척무장공비 사건이 터지고 난 뒤의 일일 것이다. 지리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내 고향 얘기를 하면 처음엔 울산으로 잘 못 알아듣다가 아니라는 나의 화답에 다시 하번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무장공비사건이다. 하여간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귀에는 울진하면 자연스레 무장공비와 연결되어 있으리라. 또한 그 중심에 이승복어린이(아니 형인가, 아니다. 우리세대에게 이승복은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있다)가 있다. 순진무구(천진난만)와 어리석음, 그 동전의 양면같은 단어로... 반공글짓기대회와 반공웅변대회의 순진하면서도 과장된 몸동작과 함께....
1968년 10월 30일부터 12월 26일까지 북한측 사망 113명 생포 7명(아군측 전사 82명, 전상 67명)으로 대변되는 비극이 생각나는 곳이다. 아래사진의 중간이 서화산 정상이고 그 아래쪽에 습지와 공수부대 주둔터가 있다.
서화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백암온천 지구의 모습
외골(새로생긴 중학교 옆을 흐르는 골짜기를)의 소태1리쪽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골에 내가 '진달래폭포'로 명명한 작은 폭포가 숨어 있다. 직폭구간 5미터 위의 와폭구간 10미터로 이루어진 15미터 정도되는..... 초등학교 6학년쯤이던가 앞집에 살던 손부영, 철영, 찬영 형제들과 아마 슬슬 몸이 건지럽던 초봄의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한창 폭포 근처에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으니... 그래서 그때 폭포를 보고 그렇게 가볍게 이름 지어진 것이리라(발견한 사람 맘이다..이름짓는건 ㅋㅋ)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했던 어린시절의 나(활동적인 애들은 겨울이라도 토끼 목노(올무를 일컫음)와 덫을 놓으러 산과 들로 활개쳤으나 나는 그런 활동에 일절 참가하지 않은걸 보면)지만 그래도 봄이 오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마 피부가 먼저 광장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터.... 그렇게 초등학교 초봄의 어느날.... 폭포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가까이 갈려고 해도 칡덩굴이 앞을 막아 끝내 뒤돌아섰다.
내가 옛집에 오면 책들 들고 찾아오는 심충성군의 집이다.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어 아침이면 앞마당으로 고라니와 오소리가 지나가고 밤이면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 그야말로 자연동물원이다.
심충성군의 방에서 바라본 풍경, 아침이면 가끔 밭을 뛰노는 고라니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오늘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려고 이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길 한복판으로 유유히 지나가는 뱀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블러그질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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