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불혹

[스크랩] 추천글 - 대구지역 민족극운동

빛의 염탐꾼 2014. 1. 20. 14:36

누가 쓴 글인지는 모르지만, 읽어보니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의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였길래 옮겨옵니다. 특히 제가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던 시절에 들어간 단체에서 했던 선동극(마당극이라고 하기엔 스스로도 민망스러워서 이렇게 말해봅니다)도 소개되어 있고 그 극의 주체가 "놀이패 도라지'라는 것도 적혀 있네요. 이글을 읽고서야 문화도 예술도 모르던 얼간이가 북치고 장구치고 거기에다 노래까지 부르던 그 시절의 그 단위가 "도라지"라는게 가물가물 기억나더군요. 아래에서 그 선동극이 "내릴 수 없는 우리들의 깃발>(1989. 4. 6)"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제가 그 단체에 들어간 것이 그해 3월인데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한달여만에 마당극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그 선동극에 투입되었다는 사실, 참으로 놀랄일입니다. 아래에서는 "경북대마당에서 공연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지금 곰곰 떠올려보니 경산대, 경주동국대, 그리고 부산의 어떤 한 대학에서도 공연했던(이건 긴가 민가, 하지만 경산대와 동국대는 확실한 듯) 듯 합니다. 내용이 "탄압받고 고문받고.... 그러나 굴하지 않고 끝내 일어서는" 뭐 그런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고 저는 고문받고 탄압받는 "박노해"라는 노동자역을 맡았는데(그라고 보면 "문화운동"의 "문"자도 모르던 초짜가 당당히 주인공 역활-노동선동극에 있어서의 노동자역활이니-을 했으니 요즘 말로 깜짝스타탄생이라고 봐야겠네요 ㅋㅋ) 내가 등장한 마당에서는 첨부터 끝까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그게 선동이라면 선동- 기억이 나네요. 박맑음형과 박철형이 대본과 연출을 동시에 했던 듯하고 문학분과의 몇명을 제외한 (구)노문연 전단원이 아래서 말한 "문화선전대"의 일원으로 동원되었는데 도토리라는 형이 노태우역활을 한 풍자마당의 한부분이 언듯 떠오르네요. 그러고보니 아마 그 시절엔 지나가던 강아지가 있었더라도 배역을 맡겼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네요.ㅋㅋ  시간이 흘러 통합되고 연극분과 김성희형이 이극에 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참으로 가관이더구나"라는 말에 나조차도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던 걸 보면 스스로도 민망함을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제는 민망함을 넘어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하여간 아래글 한 번 읽어 보세요. 추억이 떠오를 곳에는 제가 다르게 표시하였느니 너무 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 부분만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뒤져보니 그때 그시절 사진이 한 장 있네요... 제일 앞에서 꽹과리 치는 여성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참 궁금한... 도톨이형이군요. 

 

 

1. 대구지역 민족극운동 10년: 1983 ∼ 1994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이 10주년을 맞이하였다. 물론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느냐하는 문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뜬패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단체를 꾸렸던 [놀이패 탈]과 극단 [시인](是認)이 활동을 본격화한 1983년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겠다. 연극을 통한 운동을 표방한 단체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일회성 공연으로 끝이 나거나, 필요성만을 제기하는 단계에서 활동을 중단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놀이패 탈]과 극단 [시인]의 주축을 이룬 세대는 70년대 중반 이후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 연극반 생활을 하였거나, 민속문화연구회(탈춤반)을 꾸려나갔던 이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사회문화와 접하면서 사회 문화운동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논의가 진행되면서 연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 단체 결성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광주의 비극으로 시작된 1980년대 초 대구는 어두움 그 자체였다. 정치.사회운동이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기였으니 만큼 문화운동의 필요성이 더욱 강하게 제기되었으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1985년 2월 [우리문화연구회]가 창립되기 이전까지는 진보적 문예 활동을 뒷받침해줄 토양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기성 연극계의 극단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점은 여타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지역 문화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광주의 경우도, 극회 [광대]가 해산을 당한 이후 극단 [일과 놀이](1983), 극단 [토박이](1984)가 만들어지기 까지 암중모색의 길을 걸었고, 서울 지역도 [놀이패 한두레], 극단 [연우무대]가 눈에 뜨일 뿐 큰 차이는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인적 물적 토대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민족극 운동의 서막을 연 것에서 좋은 연극에 대한 대구지역의 열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1988년 봄 서울에서 진보적 연극운동 진영의 연극제를 열면서 그 명칭을 두고 논란이 분분했었는데,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사를 개관하기 위해서도 민족극의 범주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민족극은 "분단이라는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 예술이념에 기초하여, 민족현실을 민중적 입장에서 형상화해내는 연극예술"(민족극 개념 정립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이영미, [민족극의 개념 정립], {민족극과 예술운동}, 1994년 봄호, 민족극연구회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이다. 그러므로 민족극이라는 개념의 설정은 여타 문예운동과의 위상 정립과 창작 탈춤, 마당극, 마당굿, 대동놀이, 진보적 리얼리즘극 등의 민중연희 양식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개념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구지역의 민족극이 서울.광주.부산.대전 등과 두드러진 변별점은 극양식의 다채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극단 마다 조금씩 다른 극양식에 몰두하고 있는 현상은 일견 산만해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다양성이 밑거름이 되어 대구 연극을 대구 연극답게 만든 것이다. 본고에서는 민족극의 범주를 협소하게 해석하지 않고 가치개념의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민족극운동을 전면에 내세웠던 극단을 중심으로 그간의 발자취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10년 안쪽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흩어짐이 너무 심하여 공연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각 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의 역할 등은 구체적으로 다루어 낼 수가 없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고 우선 전체의 윤곽을 그리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한다.(이 자리에서 다루는 단체와 공연물은 뜬패들의 활동 흔적이며,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단체와 공연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기로 한다. 본고를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은 아래와 같다. 김성희([시월]) 김헌근([놀이패 탈]) 박현준([시인]) 신철욱([가인]) 안문규([함세상]) 이은주([떼.풀이]) 이철진([한사랑]) 해당 작품의 공연 시기는 그 작품이 초연될 때의 것만 밝히기로 하며, 작가를 따로 명시하지 않은 작품은 공동 창작이다.)

 

 

 

2. 민족극운동의 첫 걸음(1983∼1986)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을 이야기하려면 떠오르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1980년 4월 19일 경북대 중앙에 자리한 시계탑 앞에서 공연되었던 <냄새굿놀이>가 바로 그것이다. 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에 있던 김사열의 주도하에 준비된 이 작품은 공연 시간의 짧음에 비해 대구지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오래고, 컸다. 전통 탈춤을 모태로 한 <냄새굿놀이>의 공연 양식적 특징이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의 초창기를 이끈 [놀이패 탈]로 고스란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경북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탈춤반) 출신을 주축으로 한 [놀이패 탈]은 김사열을 대표로 하여 1983년 12월 17일에 결성되었다. '이 시대 이 땅의 놀이를 우리가'라는 선언이 말해주듯이 연극 공연뿐만 아니라, 춤.풍물.미술까지 아우르는 연행 예술 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창단 초기에는 한국 연극사, 서양 연극사에 대한 이론 학습을 진행하면서 밀양 백중놀이 및 대구 날뫼북춤을 전수하는 등 단체의 역량 강화에 전념했다. 1984년 6월, 창립 작품을 한일간의 문제로 확정지으면서 준비에 들어갔고, 오랜 연습 끝에 <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을 1985년 3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경북교육회관 강당에서 공연하였다.

창작 탈춤이라는 양식적 명칭을([놀이패 탈]의 창작 탈춤에 대한 입장은 198년에 대표를 맡고 있던 최재우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리된다.(최재우, [전통탈춤에서 창작 탈춤으로], {우리문학}, 제 1집, 도서출판 물레, 1986)) 사용한 <내 차라리…>는 공동 창작과 공동 연출이라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초창기 [놀이패 탈]에서는 공동 창작과 공동 연출이라는 작업 방식을 택해 연출가의 독선에서 오는 폐해를 막고자 했다. 뒷날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동 작업을 기조로 하되 각 분야에서 책임자를 선정하여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는 책임 대본, 책임 연출 방식으로 바뀐다.) 원형의 무대와 객석 배치, 관객석의 네 면에 트여진 등퇴장로 등은 탈춤의 공연원리를 되살려본 것으로 대구지역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앞놀이, 첫째 마당: 사방치기 춤, 둘째 마당:정신대풀이, 셋째 마당: 열림굿으로 구성된 <내 차라리…>는 풍물로 관객의 흥을 돋우며 극을 시작하고, 인과 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서구적 극구조와는 달리, 각각의 마당마다 이야기를 달리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지니는 방식을 선보여 전통 탈춤의 현대적 계승의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

[놀이패 탈]의 활동은 풍물놀이 <통일의 북춤>, 풍물 및 춤판 <모둠놀이>를 공연하고, 경산군 자인면의 전통 탈춤인 <자인 팔광대 놀이>의 복원에 참여하는 등 다채롭게 펼쳐 졌다. 초창기 연행 예술 운동 단체 답지 않게 도움패를 꾸리고, 각종 강습회를 열어 사람을 모으고, 회보인 '푸리'[解]를 발간하는 등 조직 관리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놀이패 탈]과 함께 민족극 운동의 한 방향을 이끈 단체가 [극단 시인]이다. 경북대 극예술연구회 출신들이 주축이 된 극단 [시인]의 첫 출발은 졸업생들의 모임이었다. 당시 공연법상으로는 극단 등록이 되어 있어야 공연이 가능했으므로 1983년 1월 22일 동인제 극단의 형식으로 결성되었다. 극단 [시인]이 연극 운동적 성격을 표방하게 된 것은 장준기가 극단 대표를 맡게된 1984년 2월 부터이다. 극단의 목표를 '연극을 통한 대사회 발언'으로 규정하고서 회보 '시인'을 발간하고, 음반을 이용한 판소리 감상회를 여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1984년 5월에 [연우무대]의 <장사의 꿈>을 초청하면서, '마당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회(임진택)를 열어,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게 느껴지던 마당극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윤대성 원작의 <너도 먹고 물러나라>(연출 김재석)를 공동 각색하여 공연 준비에 들어갔는데, 1984년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가톨릭 근로자 회관 강당에서 공연 하였다.(극단 [시인]은 기성 작가의 작품을 공동 각색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창작 대본을 만들 수 없었던 역량의 문제와 함께 사전 검열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공연허가 심사를 통과하기 용이하다는 점이 함께 작용했다.)

<너도 먹고 물러나라>는 삼면 무대를 택한 마당극이다. 자식을 지워버렸던 죄책감으로 박판수를 찾아온 모조리네가 겪는 아픔을 다룬 원작에 사회적 의미를 강화시킨 이 작품은 무대극의 원리에 탈춤식의 진행 방식을 결합시킨 작품이었다. 인과 관계에 의한 줄거리 진행에 따르면서, 무대 전면에 악사를 배치하여 극중에 개입을 하거나, 극중 인물이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등의 방식으로 관객의 극중 몰입을 차단하거나, 관객에게 비판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려했던 <너도 먹고 물러나라>는 그후 극단 [시인]의 특징적 공연방식이 되었다.(창작 탈춤의 [놀이패 탈]과 마당극의 [시인]으로 나누어진 현상은 학내 동아리 모임이었던 탈춤반과 연극반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점은 초창기 민족극운동 계열 단체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것인데, 광주의 [신명]과 [토박이]의 관계가 역시 그러하다. )

이어서 이강백 작 <파수꾼>(1985. 4)을 장준기의 연출로 가톨릭근로자회관 강당에서 공연하였는데 무대극이었다. 대중 조작에 의해서만이 정권 유지가 가능했던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으로, 당시에 보기드문 진보적 무대극이었다. 제 4회 공연은 윤대성의 <출세기>(1986. 3; 연출 김재석)를 택하여 마당극으로 재창작하였다. 극의 초점을 대중 매체의 조작에 의해 몰락하는 인간에 맞추어, 대중 매체의 힘으로 정권을 유지해야만 했던 당대 정치 상황을 풍자 했다. 1986년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공연된 이 작품은 관객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며, [시인]이 마당극 전문 극단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 활발해 보이던 극단 [시인]의 활동은 <출세기> 이후 한동안 주춤거린다. 극단의 조직면에서 체계성이 부족했고, 상시 활동이 가능한 단원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운영에 어려움이 생겨난 것이다.

초창기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문화 운동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현실감 있는 소재를 선택하여 문제제기적 시각에서 다룬 것이나, 관객들을 극중에 자연스럽게 참여시켜 그들로 하여금 극중 현실을 체험케 하는 등등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민족극 배우들의 연기가 일상 말투에 가까운 대사 구사 방식과 상징성이 강한 큰 몸동작 연기 등으로 인해 일견 거칠게 보이지만, 그것이 우리 시대의 고민을 풀어내는 탁월한 연기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심어주었다. 이처럼 새로운 극양식에 담아본 초창기 공연들은 번역극, 혹은 인기 있는 몇몇 창작극에 안주하고 있던 지역 연극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민족극 운동 단체로 튼튼히 서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제약이 많았던 시기였다. 특히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대학 재학생과 직장인들의 참여가 많아질 수 밖에 없었고, 단원들의 빈번한 이동이 자체 역량을 축적하는데 한계로 작용했다. 또한 금전적으로, 혹은 사회적 이유 때문에 공연에 알맞는 공연장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강당으로 떠돌아야 했던 것도 민족극의 확산과 발전을 막는 걸림돌이었다.(그 당시 삼면무대를 갖추고 있던 동아문화센터 비둘기홀이 민족극 계열 작품의 공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러나 동아문화센터측의 자체 기획에 따른 대여 일시 부족과 부담이 가는 대관료, 당국의 음성적 탄압으로 인해 사용이 어려웠다. 그대신 대관이 용이했던 가톨릭근로자회관이나 가톨릭문화관의 강당을 이용해야 했는데, 시설의 미비에서 오는 불편함이컸고, 정식 공연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속해서 5일 이상 공연할 수 없는 제약이 뒤따랐다.)

 

 

 

3. 민족극운동의 도약(1987 ∼ 1990)

 

1987년을 지나면서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5공화국 후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 운동 속에서 대구 지역 민족극 공연도 열기를 더해갔다. [놀이패 탈]과 극단 [시인] 외에도, 극단 [떼.풀이], 극단 [한사랑]이 창단과 더불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고, 이른바 제도권 극단으로 불리던 [처용]이 가세하면서 민족극 운동은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풍성해진다.(극단 [처용]의 활동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회에 보완하기로 한다. 이른바 제도권 연극 단체로 불리던 [처용]은 황석영 원작의 <한씨 연대기>(1987. 11)를 계기로 민족극 운동에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러던 중 최현묵 작 <터울>로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에 참여하였는데, 작품성에 관한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이영미, [민족극운동의 현단계], {창작과 비평}, 1988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사 참조) 그러한 결과는 극단 내부에서 민족극 활동에 대한 합의를 완전하게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1990년 이후 민족극 진영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된다. ) 마당극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입장의 무대극도 민족극의 훌륭한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떼.풀이]와 [한사랑]이 보여주었다.

민족극운동 협의회가 출범하기도 전인 1988년 7월에 대구와 부산.경남지역민족극 계열 극단들이 모여 영남지역 마당굿운동 협의회를 만들었다. 각 지역의 공연 성과물을 교환 공연함으로써 저변 확대를 추구하기로 하고, 부산의 수영야류보존회 공연장에서 첫번째 판을 열었다.([놀이패 탈]의 <이 땅은 니캉 내캉>, 진주 [놀이판 큰들]의 <우리 땅 우리가 간다>, 마산 [놀이패 베꾸마당]의 <말뫼뻘 사람들>, 부산 극단 [자갈치]의 <철새 공동체>가 공연 되었다.) 1988년 12월에 진보적 연극 진영의 전국적 모임으로 결성된 민족극협의회에 다섯 극단이 참여함으로써 서울과 버금가는 세를 과시했고, 1990년에는 서울을 제외한 최초로 대구지역에서 민족극 한마당을 개최하여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민족극 한마당 개최를 계기로 복합 문화공간인 [예술마당 솔](대표 정지창)이 만들어져 민족극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창단 공연 이후 연극 공연 보다는 여타 활동에 치중하는 듯이 보이던 [놀이패 탈]이 <꼬리 뽑힌 호랑이>(1987. 2)를 시작으로 해서, <엉겅퀴 꽃>(1987. 10) <이 땅은 니캉 내캉>(1988. 3) <노동자의 햇새벽>(1988. 8) <米國, 美國, 未國>(1989. 4) <선새임요>(1989. 9) <단결! 투쟁!>(1990. 3) <골프 공화국>(1990. 9)으로 이어지는 활발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즈음에 [놀이패 탈]의 공연 양식이 창작 탈춤에서 마당극으로 변화 한다. <엉겅퀴 꽃>(책임연출 형남수)은 창작 탈춤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남존여비의 악습을 고발한 이 작품은 전체가 3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경과 제 2경은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제 3경에서 연계되면서 결말을 맺게된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창작 탈춤에서 다루기 어려웠던 서사적 완결성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거창의 양민 학살 사건을 극화해낸 <이 땅은 니캉 내캉>(책임 연출; 장재화)은 마당극으로 만들어진 첫 작품이며,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풍물과 슬라이드, 해설과 춤을 적절히 융합시켜낸 이 공연은, 그동안 역사의 뒤안에 매몰되어 버렸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진상을 드러냄으로써 충격을 던져 주었다.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추적할 때 서사극적 기법을 사용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마당극에 서구적 공연 기법이 어떻게 녹아들 수 있는가를 제대로 보여준 성과를 올렸다.

<노동자의 햇새벽>(책임 연출 최재우)은 대노협, 우문연과 연합 공연으로 계명대 민주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일회성 공연이긴 하지만 [놀이패 탈]이 현장 공연을 의식하면서 참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전의 작품들이 극장 중심의 공연 방식에 머물고 있었다면, 이후의 작품들은 현장의 관객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공연 방식을 찾아 간 것이다. <노동자의 햇새벽>에서 얻어진 경험이 바탕 되어 전교조 결성 과정의 갈등을 다룬 <선새임요>, 파업에 임한 노동자의 분노와 희망을 담은 <단결! 투쟁!>, 6공 최대의 비리로 말썽 많았던 골프장 건설 의혹을 다룬 <골프 공화국>을 낳게 된다. <선새임요>는 교직원 노동조합과 <단결! 투쟁!>은 공장 노동조합, <골프 공화국>은 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 단체들과 연대하여 현장 중심의 공연을 계속 하게 된다. 기둥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절성이 강한 장면 중심으로 짜여진 이 작품들은 극장 공연보다는 야외 공연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한 성과는 <선새임요>에서부터 책임 연출의 형식으로 가세한 연출가 김창우와 [놀이패 탈]의 역량이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기본적인 줄거리를 설정한 다음, 장면 단위로 분할하여 작품을 짜나가는 방식은 그 이전의 공동 창작과는 또다른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짜여진 작품은 각각의 장면이 고유한 의미단락이 되기 때문에 내용 전체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극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별반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야외 공연의 경우 관객들의 집중도가 실내 공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므로 부분, 부분이 강조되는 이러한 구성 방식이 유용할 수 있는 것이다.

1987년에 활동이 뜸했던 극단 [시인]도 전열을 재정비하고 교육문제에 대한 작품을 잇달아 내어 놓았다. {민중교육}지 사건, 평교사 협의회 등으로 어수선 하기만 했던 교육 현장의 상황을 3부작으로 다루어 보기로 계획을 세우고 작업에 착수 했다. 우리 교육의 오늘이 있게된 역사적 상황을 먼저 다루고, 그 다음으로 학생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을, 이어서 교사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교육 현실을 다루기로 했다. 장미화 원작에 김재석 연출로 공연된 <전천후 선생님>(1988. 5)과 <서서 잠드는 아이들>(1988. 9)이 그것이다.(세번째 작품은 전교조 결성에 따른 상황의 변화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극단 [시인]이 해체되어 이루어지지 못한다. 두 작품을 제공한 극작가 장미화의 활약도 특기할만한데, 극단 [한사랑]의 박철과 더불어 대구지역 민족극 진영의 중심 작가로 활동하였다.)

<전천후 선생님>은 일제치하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해방 이후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해온 교장을 통해, 일제치하에서 4.19 직후 교원노동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주체적이지 못했던 교육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비판했다. <서서 잠드는 아이들>은 아이들의 입장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얼룩진 교육 현장과 그들의 고민을 담고 있다. <서서 잠드는 아이들>은 청소년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 연극의 대명사로 불리던 <방황하는...> 씨리즈와는 차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포항.마산.부산 등지를 순회 공연하면서 마당극 특유의 역동적 판과 학생 관객들의 열기가 함께 어울려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극단 [떼.풀이]의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대구지역 민족극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내건 마당극에 치중했던 [놀이패 탈]이나 [시인]과는 달리 브레히트의 서사극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떼.풀이]의 작업은 이색적인 것이었으나, 강한 실험정신은 그만큼 대구지역 민족극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극단 [떼.풀이](대표 정문태)의 이름을 내건 첫 작품인 <햄릿>(1986. 10)은 작품내에 들어있는 시위 사진 때문에 동아문화센터 비둘기홀에서 쫓겨나, 가톨릭 문화관 강당으로 옮겨가야 했다. 1987년 들어 <신문 1, 2, 3> 연작을 내어 놓으면서 [떼.풀이]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매매춘 현상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을 본격화 한다.

극단 [떼.풀이]의 성격이 돋보인 작품은 핵문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미 아라발의 <또스토예프스키라는 이름의 거북이>(정문태 연출, 1986. 12)에서 핵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그들은 홍가이 작 <히바쿠샤>(정문태 연출, 1987. 11) 공동 창작의 <먹이사슬>(1989. 2)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에서 핵의 위험성을 폭로하였다. 제 2회 민족극 한마당 참가작이기도 한 <먹이사슬>은 원자력 발전소의 핵폐기물 투기 사건을 바탕에 깔고, 각종 슬라이드 사진을 활용하는 한편, 가면극, 그림자극을 적절히 활용하여 핵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렸다. <먹이사슬>은 영덕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의 초청 공연을 필두로 핵문제와 관련있는 지역의 초청이 줄을 이을 정도로 호응이 컸다. [떼.풀이]의 공연은 은폐되어 있는 문제들을 드러내어 고발하는데는 무대극적인 공연 방식이 유용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1988년, "민중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운동성과 예술성을 바탕으로 한"(강령) 연극을 추구하려는 [한사랑](대표 이철진)의 창단은 민족극 진영의 큰 힘이 되었다. [한사랑]은 학맥과 인맥에 기초하여 운영되던 기왕의 극단들과 달리 연극에 대한 이해의 공감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체이기에, 민족극 진영의 확산을 말해주는 증거로 의미가 깊다. 창단 공연인 <단발령>(1988. 4)부터, <비풍초똥팔삶>(1988. 7) <종이도시>(1989. 2)까지는 박 철 작.안 빈 연출의 체계로 이루어졌다. [한사랑]은 서구식 액자무대에 기초한 사실적 표현의 극을 특징으로 하면서 사회 문제, 특히 도시 빈민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철거 대책 위원회와 재개발 추진 위원회 사이의 갈등을 다룬 <종이도시>는 6공화국의 실책으로 꼽히는 주택 문제를 도시 빈민 문제와 결합시켜 낸 문제작으로 꼽힌다. <시월>(1990. 6)과 <벽>(1989. 6, 1990. 11)은 [한사랑]이 역사를 향해 시선을 돌린 결과물이다. 1946년 대구를 시발로 경북 일원을 거쳐 전국에 확대되었던 10월 항쟁을 소재로 한 <시월>은, 극 전개상의 무리에도 불구하고, 10월 항쟁의 역사적 복권을 시도한 작품으로 그 의의를 인정 받아야 할 것이다. 제 3회 민족극 한마당에 참여했을 때 당국의 감시 대상이기도 했던 <벽>은 국가 보안법의 개폐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수작이다. 어느날 갑자기 끌려가 고문 끝에 간첩이 되어 버린 김충식의 모습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정권 안보 차원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좁은 무대 공간을 잘 살린 무대장치와 재치 있는 장면 연결로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 대구지역 민족극의 특징은 한마디로 '다채롭다'라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놀이패 탈] 극단 [시인] 극단 [떼.풀이] 극단 [한사랑] 극단 [처용] 등 다섯 극단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담은 작품을 내어놓았고, 그 작품들은 대구지역 관객들에게 열띤 호응을 얻었다. 교육문제.노동문제.핵문제.도시빈민문제 등 소재의 영역이 세분화되었고, 극양식적 면에서도 마당극과 무대극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각 단체마다 상당한 연륜과 기량을 갖춘 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을 이끌어감으로써 그 이전에 비해 월등한 효과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단시일내에 이룩해낸 대구지역 민족극운동의 이러한 성과는 전국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해서 극단 [시인]과 [떼.풀이]가 해산을 하게 되고, 극단 [한사랑]이 활동 중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뒤이어 [놀이패 탈]이 발전적 통합을 위해 극단을 해산하게 되어 대구지역 민족극 단체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민족극 운동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외면상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으나, 그 내면을 짚어보면 전문성을 확보하여 민족극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진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구지역 민족극 극단들은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인적 자원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 이전에 비해 전업적 연극인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극단마다 상시 활동 인원보다는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참여하는 인원이 더 많았기 때문에 전문성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애로 사항이 많았다. 특히 배우들에게서 그러한 점이 두드러졌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작품을 대하게 되는 것이므로, 고도의 기량을 갖춘 배우들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의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몇 번의 공연만으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에 따라 장기적인 계획하에서 배우 수련을 쌓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더구나 민족극 계열 극단들은 여타 극단들과는 달리 문화운동 단체로서의 기능을 중시 하고 있었다. 문화 선전대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었던 80년대 후반 사회 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각종 시위 행사(?)에 참여 하였고, 풍물 강습.지신 밟기.영화상영 등등의 일들로 대구지역민들의 문화 수요에도 부응해야만 했다. 한정된 인원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고, 노력에 비해 성과가 두드러지지 않는 겨우도 많아졌다. 그러한 가운데 연극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중심으로 민족극 진영이 재편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단체의 해산과 새로운 모임을 통해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은 전문성 확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 민족극운동의 전문성 모색(1991∼ )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의 조짐이 생겨났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변화가 만들어낸 바람이 태풍이 되어 우리나라를 덮쳤다. 연극계에도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극단 [아리랑]이 동숭동 연극축제인 사랑의 연극제에 참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도권 연극과 비제도권 연극의 경계선이 애매해졌고, 극단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강하게 드러났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배우를 내세운 극, 여성들의 취향을 맞춘 극,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한 대형 뮤지컬 등이 관객의 시선을 앗아갔다. 대구지역 민족극계도 능동적으로 그러한 경향에 맞서고자 했는데, 극단의 통합을 통하여 전문성을 확보하여 뛰어난 기량의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흐름을 주도한 극단이 [함께사는 세상](이하 함세상)이다. [함세상]은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을 주도해왔던 [놀이패 탈]과 신예의 극단 [진달래](극단 [진달래]는 손병렬을 대표로 하여 1990년에 창단되었다. 마당극에 전망을 둔 단체였는데 창단 공연 작품인 <아버지의 연장 가방>을 준비하던 상태에서 통합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다.)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단체이다. 민족극의 정립을 목표로 내세우고 1990년 12월 21에 김헌근을 대표로 하여 창단되었다. 대구 지역 최초로 10여명이 넘는 인원이 상시 근무 체제를 갖춘 [함세상]은 각고의 노력 끝에 창단 작품으로 <노동자 내 청춘아!>(1991. 5)를 공동 창작, 김창우 책임 연출로 내어 놓는다. 해직 노동자의 고난과 좌절, 그리고 극복을 담아낸 이 작품은 1991년도의 민족극 계열 공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해고 노동자의 투쟁하는 모습보다 그의 고통과 아픈 가슴을 우선 내것으로 느껴보자"(팜플렛)는 작품의 의도는 등장 인물의 탁월한 형상화에 힘입어 성공을 거둔다. 외로움을 느끼는 해직 노동자 상철, 회사측의 요구에 갈등하는 늙은 노동자 김씨, 회사의 지시 사항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안과장 등의 인물이 함께 어울려 가슴 뭉클한 감동을 그려내었다.

<해직일기 - 아저씨, 어! 선샘예>(김창우 연출, 1992. 5)도 정서적으로는 <노동자 내 청춘아!>의 연장 선상에 서는 작품이다. 1989년 1500여명의 선생님들이 교단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뒤 그들의 삶이 어떠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교단을 떠난 뒤 3여년의 세월, 궁핍해진 생활보다 더욱더 그들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가르치고 싶다는 열망이다. 그에게 가해지는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시위 현장에서 마주친 제자와 함께 손을 맞잡는 순간 그는 해직 교사라는 신분을 넘어서 이 땅의 교사로 일어서는 것이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1993. 5)와 <궁궁을을--1894>(1994. 4)는 역사극의 전범을 창조해보겠다는 의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진주농민항쟁과 갑오 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을 담아낸 두 작품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사건보다는 이면에 숨어 있는 민중들의 숨결을 포착해내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두 작품은 서사적 완결성을 지닌 이야기보다는 장면 장면이 던져주는 의미를 중시하고 있다. <이걸이...>에 비해 <궁궁을을>은 그 정도가 더욱 강화되었는데, 기본 줄거리마져 파괴하고 갑오농민 혁명 당시에 만날 수 있었던 전형적 사건들을 장면화하여 배치하는 것으로 한 편의 연극을 만들었다. 기존의 역사극과 경향을 달리하는 극구조는 관객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사극의 지향점이 과거의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상황에 던질 수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실험이라 여겨진다.

극단 [함세상]은 창단 공연 이래 극장 중심의 공연보다는 현장을 찾아가는 기획 공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왔다. 각종 사회 단체와 연계하여 이루어지는 이러한 공연 방식은 극장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정세 변화에 따라 현장에서의 공연이 급속도로 감소되면서 대학내의 공연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신태평천하>(1994. 9)를 내어 놓았다.

<신태평천하>(연출 김재석)는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의 구조를 차용하여 현재 상황에 맞게 재창작한 작품이다. 온갖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해온 사채업자이자 부동산 투기꾼 윤사장 일가의 삶이 전면에 부각되어 비판받는다. 이 작품은 그 이전의 [함세상] 작품들과는 여러면에서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야외 공연이 아니라 극장 공연을, 특히 [예술마당 솔]에서의 공연을 의식하고 만들어졌으므로 배우의 수를 최소화하고, 동작선을 단순화시킨 점이 있겠고, 부정적 인물들만을 등장시켜 그들 스스로 자신의 결함을 드러내게 하는 풍자 희극이라는 점도 그러하다. 또한 극단 자체의 기획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순환 기획제를 도입한 것도 이채롭다. 광고가 일상 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화려한 연극들이 관객을 현혹하는 이 시점에서 민족극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보기 위한 시도라 하겠다. 작품과 기획 양면에 걸쳐 실험적 태도를 보인 <신태평천하>의 성과는 앞으로 민족극운동 계열 작품의 향방을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대구지역 민족극 운동 단체들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 현장에서의 성과는 그리 크지 못했다. 그 이전의 성과로는 "문화선전대로서의 발전의 전망"을 가지고 1988년에 결성되었던 [놀이패 도라지]가 있다. 대구 민중문화운동연합 내의 연희 분과의 실천 단위였던 [놀이패 도라지]는 마당극 <내릴 수 없는 우리들의 깃발>(1989. 4. 6)을 경북대 마당에서 공연했을 뿐 "광범위한 문화 투쟁"에는 미치지 못한 채 해산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현 시기 이땅 민중들과 노동자들의 잠재된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려고 결성된 전문극단"(창단 공연 팜플렛)을 목표로 1991년 1월에 창단된 [시월]의 부침(浮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극단 [시월]은 대구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연극 분과 였다. 워크샵공연으로 마련한 <인간사 세상사>를 가지고 각 대학을 순회하는 준비 작업을 거친 후, 공동 창작.연출의 <꿈의 대화>(1992. 10)로 창단 공연을 하였다. 허황된 꿈만 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꿈의 대화', 노동자와 사용자간에 인간적 관계를 꿈꾸던 회장의 고민을 다룬 '늙은 회장의 꿈', 회사만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해직되어 버린 노동자의 이야기 '늙은 노동자의 꿈'으로 이루어진 <꿈의 대화>는 계급적 관점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특징을 보였다. 이어 <빈방 있음>(1993. 5)을 내게되는데,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대구 노문연의 해산과 함께 극단도 해산하게 된다.

결과만 두고 본다면 [시월]의 공연 활동은 창단 목적에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열악하기 그지 없는 대구 지역 노동계의 상황도 이유가 있겠지만, 현장 활동에 주력할 수 있는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이 더 크겠다. 민족극 운동이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극단의 목표 설정이 분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후반의 민족극 계열 극단들 처럼 전방위적 활동으로는 변화하는 세태에 앞서나가면서 민족극의 수립이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월]의 해산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시월]이 자체 공연보다는 현장의 비전문 연극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역할에 좀더 치중했어야 했다는 느낌이 든다. [시월]처럼 현장 지향의 성격이 분명한 극단이 있을 때 전문 극계의 역량이 현장으로 흘러 들어가고, 현장 중심의 공연 활동이 가지고 있는 생동감이 전문 극계로 흘러 들어올 수 있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 [가인](대표 이철진)은 극단 [시월]과 극단 [한사랑]이 1993년에 발전적 통합을 이룬 단체이다. 작품성있는 공연을 통해 민족극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시월]은 창단 공연으로 함세덕의 <감자와 쪽제비와 여교원>(연출 이철진)을 택하였다. 일제강점기하의 풍경과 현재적 상황을 연결시켜 보았다. 함세덕의 작품으로 그러한 효과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따랐지만, 월등히 높아진 배우들의 기량이 그러한 점을 덮어주었다. 극단 한강의 공동 창작인 <사람.사물.장소.이념>을 각색한 <세 귀와 한 입>(김성희 연출, 1994. 4)과 황석영 원작의 <장사의 꿈>(김성희 연출, 1994. 8)을 이어 올림으로써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극단 [가인]은 그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듯이 조심스런, 그리고 먼날을 바라보는 태도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앞으로 [가인] 특유의 색깔이 분명해질 때 대구지역 민족극은 또 한 단계 발전하게 될 것이다

출처 : 대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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