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련에 대한 생각
이승하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만세삼창을 하고...
천황폐하가 하사했다는 술 반잔을 담숨에 들이켠
조선인 청년 박동훈*
비행기에 올라타다
제가 죽으면
저의 이름을 누가 슬퍼할까요
제 이름을 누가 기억할까요
저는 두 시간 뒤면 죽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이 몸
이 비행기와 함께 산산조각 나리
티끌 하나 남기지 않으리
1944년 11월 어느 맑은 날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하늘엔 구름이 저렇듯 제 맘대로 흘러가고
눈아래 바다, 반짝이는 햇살 받아
금비늘 은비늘의 물살
살아 있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국이 없으니 그대, 이제 곧 죽어야 한다
기지로 돌아올 비행기 연료는 넣어주지 않았다
눈앞을 스치는 가족의 얼굴 일가친척, 친구들의 얼굴
그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으리
아부지!ㅡ 어무이!ㅡ 형니임!ㅡ 누부야!
다시는 불러볼 수 없으리 만나볼 수 없으리
눈앞에 들어온 미국 항공모함
시계를 본다 그대 목숨 이제 1분 남았다
59초,58초, 57초, 56초, 53초, 52초, 51초, 50초, 49초,
나 이제 죽는다 나는 사라진다
48초,47초, 46초, 45초, 44초, 43초,
어무이!ㅡ 아부지요!ㅡ 누부야!ㅡ 형니임ㅡ!
마지막으로 한 번씩 불러본다
42초, 41초,40초,39초,38초,37초,36초,35초,34
조종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31초,30초, 3=29초, 28초, 27초, 26초, 25초, 24초, 23초, 22초, 21초
목표 지점! 항공모함 함수를 향해
방향타를 꺾는다 급강하 시작
20초, 19초, 18초, 16초, 15초, 14초,
엄청난 풍압, 어금니를 깨문다
13초, 12초, 11초, 10초,
저 먼저 갑니더 하늘나라로 갑니더 나중에 뵙겠심더
9초, 8초,
눈을 감는다
심장이 따갑게 뛰고 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7초, 6초, 5초, 4초,
순간 눈을 뜨자 눈앞에 와락 달려드는 쇳덩어리
3초, 2초, 1초,
목련꽃 진다 박동훈
*<특공대 전몰자 위령 평화기념회>가 발간한 <특별공격대 명부>에는 17세 박동훈 외 15명의 조선인 출신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즉, 최소 10명 이상의 조선인 청년이 태평양전쟁 중에 가미가제 특공대원으로 폭사하였다.
점심시간을 이용, 도서관에 가서 아침에 거론했던 시를 찾기위해 시코너를 뒤졌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얼른 빌려 사무실로 달렸다. 인터넷에선 도저히 못찾을 만 한 내용이다. 제목이 목련이나 폭력과는 전혀 무관한(아니 폭력과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지만) '루니놀'이란다.
루미놀*
이진희
목련
꽃샘추위 무렵, 사립 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흔들, 흔들, 흔들리는
단발머리 앳된 계집애들의 무수한 주먹
튀김만두
씹을수록 구미 당기는 소문
더러운 바람, 더러운 구름, 더러운 기름에 튀겨졌으나
판매율 단연 최고
번들번들
집게 모양을 한 엄지와 검지, 오물거리는 입술
사진관 사내의 눈알
딸랑, 문이 열린다 실내가 어두침침하다
꽃무늬벽지
촬영실 안쪽 새로 도배한 벽
탐문수사 하던 형사들의의심을 산 결정적 이유
증명사진
풀어헤쳐진 앞섶, 피로 물든 젖가슴
갈래머리 여고생이 사진관 바깥에서 인화될 때마다
대기가 뿌옇다
꽃샘추위
소도시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었다는 알몸 변사체
매점으로 몰려가는 파랗게 언 종아리들
잽, 잽, 잽을 날리는 목련 봉오리
*루미놀: 혈흔 감식에 쓰이는 물질.
해설: 신형철
시를 시가 되게 하는여러 기교 중 하나는 감춤과 드러남의 줄다리기입니다. 이 작업이 잘만 되면 시는 어떤 '사건'을 머금게 됩니다. 어떤 사건의 특정 국면들을 몽타주처럼 엮어놓은 시. 앳된 여학생들이 누군가에게 집단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대뜸 제시됩니다(1연).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는 "더러운" 소문이 이 린치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2연). 사진관 사내가 뭔가 열쇠를 쥐고 있군요(3연). 형사들이 사진관을 수색하여 단서를 찾아냅니다(4연). 여고생 하나가 살해되었군요. 아마도 사진관 사내가?(5연) 여고생의 시체가 발견됩니다(6연). 이 각각의 연들은 사건의 진실을 암시하는 일종의 '혈흔'들입니다. 시의 제목이 루미놀인 것은 그래서이겠지요. 이 혈흔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몸통을 재구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 이 시는 은폐된 사건을 드러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를 재미있게 만든 건 사건을 은폐하는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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