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주망/문학

정철훈의 시

빛의 염탐꾼 2015. 4. 2. 17:26

며칠전 컴퓨터 모니터로 '디지털 창작과 비평'을 읽다가 몇해 전 신인시인상 수상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읽어보니 머리와 가슴에 남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생각나서 읽어보니 질투가 날 정도로 마음에 들어서 그 자리에서 배껴 적었지요. 인쇄는 돼는데 복사는 안 되게 되어 있더라고요.

이사 끝내고 물건들이 제 자리를 잡은 뒤라 배껴두었던 시를 타이핑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냅니다. 제가 추구하는 경향성에 참 잘 맞는 시 같습니다. 일상의 소재가 짙은 사회성을 담아내는 주제로 아연스레 연결되고 몇몇의 구절들은 이성적 직관력과 감성적 울림을 함께 갖춘 것 같습니다. 예들 들면 [백야]의 '모스크바에 와서야 어둠은 비로소 밝혀지고 있었다' '다시 혁명을 위하여 밤은 깊을수록 좋았다' '밝으면서 어두운 채로 날이 새고'와 [선거에 대하여]의 '남자의 선택기호들의 역대전적이/그의 민주주의와 그의 산소량을 만든다'라는 구절들이 그렇지요.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지만, 산소와 금붕어, 그리고 선거와 민주주의를 이런 식의 기발함으로 담아낸 정치풍자시는...... 하여간 오랜만에 정신을 번쩍 들게해준 시였습니다.

참고로 [백야]의 '주라블리'는 러시아어로 '백학'이랍니다. 모래시계의 주제가,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네요.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이하생략)'

여러분들의 느낌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비오는 밤입니다. 7-80년대가 어두운 채로의 밤이였다면 지금은 밝은 채로의 밤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자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잠들지 못하는 백야의 길고 긴 꼬리처럼 죽지않은 빛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테지요. 여러분들의 마음이 곧 그 빛을 부를 수도 있겠지요.

 

2004년 12월 6일 황완규 옮겨 적고 몇 자 보태다.

 

백야

 

모스크바에 와서야 겨우 숨을 쉰다

천구백구십육년 유월 삼십일 여름

폭우가 백야의 하늘에서 쏟아졌다

눈을 감지 않는 뻘건 대낮같은 하늘 아래서

여름 밤의 찬공기를 마신다

적색 경보가 발효중인 대류권에서

붉은 오존층을 뚫고 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혁명처럼

대지를 두들기고 있었다 보랏빛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평선 저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태양과 더불어

우리의 식어가는 심폐기능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죽지 않는 빛이 갈무리되고 주라블리*들은

떼지어 우주를 향해 날았다

잠들지 못하는 백야의 길고 긴 꼬리처럼

하얀 날들은 밤을 꼬박 새며 날개짓하고

모스크바에 와서야 어둠은 비로소 밝혀지고 있었다

기억 속에 가라앉았던 어둑한 밤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스스로 發光하며 젖은

자작나무숲의 비린내처럼 풍겨오는 하얀 밤

다시 혁명을 위하여 밤은 깊을수록 좋았다

밝으면서 어두운 채로 날이 새고

그날 서울엔 두 차례나 오존주의보가 내리고

모스크바엔 혁명불감증이 발효됐다

 

선거에 대하여

 

누런 아교풀이 그들의 얼굴 밑에서

벽을 탁 흐르다 굳어 있다

얼굴과 기호들은 떨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 종이의 질과

오프셋 인쇄기술의 개가일까

초등학교의 낮은 담벼락이 빗방울을 먹고

머리가 벗어진 남자가 금붕어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지나간다 붕어는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확대경같은 비닐에 큰 입을 대고 뻐금거린다

금붕어는 산소가 모자라 뻘겋다

남자의 기호는 비닐일까 금붕어일까 魚頭일까

남자의 얼굴도 산소가 없다

침을 뱉는다 담벼락 밑으로 흐르다 만 누런 아교풀과

그 아래 들러붙은 침은 느낌이다

남자는 기호 1번에서 기호 7번 밑을 느리게 걷는다

붕어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이름과 기호로 작동되는 정치벽보처럼

그의 이름과 그의 기호는 비닐 안의 정치처럼

산소가 없다

일곱장의 벽보들은 한결같이 눈이 없다

누군가 그들의 눈을 찢어버렸다

벽보는 얼굴이 아니라 하얀 백상지임이 밝혀졌다

이젠 기호만이 온전할 뿐이다

1에서 7까지 그들은 아마추어처럼 웃는다

남자가 선택한 기호들의 역대전적이

그의 민주주의와 그의 산소량을 만든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의 일곱 난장이들의 성대도

산소부족으로 빨갛게 부어 올랐다

 

다시 읽어보니 화려한 수사에 가려 주제가 뒷전을 밀려난 듯한 느낌이 드네요.... 문예창작학과에서 가르치는 틀을 그대로 옮긴 듯한..... 신춘문예의 틀에 꼭 맞는.... 하나 그래도 마음에 드는건, 이런 소재를 요즘의 시인들이 꺼려하는 주제에 담아내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탐이 나는 시입니다. 우공이산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으니까요.... 결과야 어떻든간에.....

 

20006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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