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어느새

빛의 염탐꾼 2019. 3. 10. 22:18

어느새

    


 

이제서야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네 속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

조금씩 조금씩 시나브로 차츰

짧은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년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긴 생머리가 단발머리가 되고

나란히 앉아있던 벤치의 색깔이 모두 바래졌어도

선심 쓰듯 이제 겨우 생각났다며

지난날의 나는 잊어 주세요?

그 시간은 여백과 농담(濃淡)으로 남겨두면 안 되겠냐고?

지금 나 농담(弄談)할 기분 아니야

그건 공백과 공란과 침묵과 독백의 시간

그런다고 무관심과 냉대의 상처가

눈 녹듯 사라지는 거 아니야

그냥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구나 너란 놈은 참

어느 틈에 벌써 사람을 바꿔치기 하듯

기억도 그렇게 바꿔치기 할 수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이제

너를 완전히 지워 줄 거야

아마도 너도

씨 뿌리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가을의 어느 날 어느덧 문득 비로소

몰라보게 자랐네 그런데 쓸 만한

놈이 없네 하는 뒤늦은 탄식과도 같은

비참한 기분을 맛보겠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한 통 속에

무더기로 뒤섞여 무작위추첨을 당하듯

그 때 가서 태평농법이라고 우긴다고

지나간 시간이 다시 살아오는 건 분명 아니고요

청문회에 나온 정치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외쳐대는 이유를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왜 자꾸만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그 사이의 기억은 온통 비워 둘께요

제발 그냥 모른 척 해요

해빙기의 바위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듯

그건 아마도 너도 나도 아무도 모르는 틈에

벌어진 엄청난 균열의 징조

그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그저

알려고도 아는 척도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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