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이제서야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은
처음부터 네 속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
조금씩 조금씩 시나브로 차츰
짧은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년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긴 생머리가 단발머리가 되고
나란히 앉아있던 벤치의 색깔이 모두 바래졌어도
선심 쓰듯 이제 겨우 생각났다며
지난날의 나는 잊어 주세요?
그 시간은 여백과 농담(濃淡)으로 남겨두면 안 되겠냐고?
지금 나 농담(弄談)할 기분 아니야
그건 공백과 공란과 침묵과 독백의 시간
그런다고 무관심과 냉대의 상처가
눈 녹듯 사라지는 거 아니야
그냥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구나 너란 놈은 참
어느 틈에 벌써 사람을 바꿔치기 하듯
기억도 그렇게 바꿔치기 할 수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서 이제
너를 완전히 지워 줄 거야
아마도 너도
씨 뿌리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가을의 어느 날 어느덧 문득 비로소
몰라보게 자랐네 그런데 쓸 만한
놈이 없네 하는 뒤늦은 탄식과도 같은
비참한 기분을 맛보겠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한 통 속에
무더기로 뒤섞여 무작위추첨을 당하듯
그 때 가서 태평농법이라고 우긴다고
지나간 시간이 다시 살아오는 건 분명 아니고요
청문회에 나온 정치인들이 한통속이 되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외쳐대는 이유를
막장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왜 자꾸만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그 사이의 기억은 온통 비워 둘께요
제발 그냥 모른 척 해요
해빙기의 바위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듯
그건 아마도 너도 나도 아무도 모르는 틈에
벌어진 엄청난 균열의 징조
그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그저
알려고도 아는 척도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