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구월

빛의 염탐꾼 2019. 8. 28. 15:07

구월

    


 

초식동물들의 배가

남산만큼 부풀어 오르고

어떤 무덤가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처서 백로 다 지나고

한 조각의 햇빛조차 아까운 노부부가

서로의 흰 머리카락을 비비며 조는 사이

제철 맛을 잃어버린 끝물채소들이

더 많은 열매를 달고

빗물을 가득 채운 해골바가지처럼

길가의 늙은 호박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그믐의 수만큼 제 모습을 감추고

목 빼고 기다리는 하루치의 보름()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양을 늘리거나 크기를 키우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초심이여

비워내지 못하는 발정기의 슬픔이여

모든 언약들은

봉숭아 꽃물 되어 지워져가고

배롱나무의 붉은꽃은 늘 백일천하의 완성

굵고 실하지 못하면 태어나지 않음만도 못한

가을이 온다 해도

더는 내어줄 것이 내겐 없나니

미쳐 날뛰는 것들이여

그래봤자 한철이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구월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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