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똥집

빛의 염탐꾼 2019. 9. 12. 17:38

똥집

 


 

끝이 없는 모래밭을 걸어가고 있어요 삶은 가만히 있어도 어떤 거대한 물결에 밀려 하루아침에 불쑥 떠오른 모래톱과 삼각지 같아서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운동화나 구두 뒷굽에 자꾸만 모래알이 쌓여요 허리에 태엽을 감고 제자리를 맴도는 나는 천년이나 비가 오지 않은 이곳에서도 절대 목마르지 않아요 지나가는 풍문에도 관심을 접은 지 오래 시간을 잃어버리고 자주 사는 게 그냥 참 밥맛이야, 하얀 밥알이 모래알이 되어서 목구멍을 넘어가지요 눈물 젖은 빵이 아니고 씹으면 씹을수록 변하는 모래알이라니? 진흙쿠키를 먹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나오는 국제구호단체의 모금 광고보다 못한 뻔한 성공담이 될께 뻔한걸요 한 달 전에 맹장제거수술을 받은 친구가 포장마차에서 씽크홀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인생 뭐 별거 있나? 닭똥집도 모래를 많이 먹은 놈의 것이 더 맛있다나 뭐라나 그거 전혀 근거 없는 속설 맞죠? 세탁기 거름망을 갈 듯 신발과 바지 주머니에 쌓인 모래알도 털어내야 하는 적당한 주기가 따로 있나요? 손가락을 걸며 새겨 넣은 사랑의 맹세가 순식간에 파도에 부서지듯 산다는 건 이리저리 쓸리며 부서져 가는 것 그저 증기로 뒤덮인 한증막에서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흐린 눈으로 조금씩 떨어지거나 쌓여가는 모래시계를 곁눈질하고 있지요 광도를 착각한 가로등이 흐린 날 한낮에 켜지듯이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덩어리가 가슴속에서 불쑥 올라오기도 해서 난감할 때도 있긴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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