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길게/자작시

서리

빛의 염탐꾼 2019. 12. 31. 16:17

서리

 

 

나도 이제 염색약 광고에 눈이 가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평소에는 이발을 하고 집에 와서 셀프염색을 했는데 겨울로 접어드니 그마저도 귀찮아서 오늘은 그대로 미용실에 맡겼다


젊은이들이 하는 까만색이 아닌 머리 염색을 지극히 못마땅해 하고 티브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요란한 머리 색깔에 대해 말세 운운하며 혀를 차면서도 자신의 머리 염색은 거르지 않던 노모는 화병과 우울증이 온 몇 해 전부터 염색도 뭐도 다 귀찮다며 드디어 저 들판의 백발 성성한 갈대로 변했다 평생 검은색과 흰색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그녀의 "물들이다"는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도 회색도 노란색도 핑크색도 모르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탈색의 과정이었지만 그 물들이고 물드는 고단한 가슴 한켠에 아직도 기적같은 변색을 향한 어떤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지 올해도 어김없이 씨레기 만들려고 서리 내리기 전에 무 수확하는 건 잊어먹지 않았다


내가 살던 길림 송화강변에는 겨울이면 서리꽃이 만발하여 사진가들의 겨울작품 단골 촬영장소였는데 다시 한 번 가 본다 가 본다 하면서도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머리카락에 서서히 서리가 내려앉고 마음속에 살얼음이 끼는 것도 송화강의 눈부신 서리꽃도 덕유산의 고고한 상고대도 모두 겨울이 만들어낸 일이고 보면 차갑게 식어가는 이 겨울 내 몸 어딘가에도 무엇으로 다시 피어날 작은 물기가 아직 남아 있을까


오뉴월에 맺힌

어떤 순백한 한의 결정체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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