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겨울
개나리 만발한 언덕을 넘어 갔다 어느 무덤가를 지나가는데 추석 무렵에 놓아두었을 법한 노란국화의 빛이 너무도 선명하길래 일부러 가서 만져보니 조화였다 다시 한 번 보았는데도 너무 감쪽같아 저 무덤 속의 인물도 혹시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괜히 섬뜩했다 눈 한 송이 내리지 않는 겨울, 신호등의 파란불도 빨간불도 모두 노란색으로 희미해져서 눈을 자주 비볐고 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의 노란 정지선에서 자주 발을 헛딛었다 어떤 날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길을 잃고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병원에 가서 진료대기실 티브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가 되면 각별히 골절과 인대손상을 조심해야 한다는 보험상품 쇼핑호스트의 말을 들었고 내 눈을 몇 번 뒤집어 본 의사가 충혈된 눈을 껌뻑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색맹은 갑자기 오지 않고요 그저 영양결핍에 노안일 뿐이라는 말과 몇 가지 약과 관련된 처방법을 건성으로 들었다 힘없이 나오는 등 뒤로 따뜻한 날씨에는 미세먼지와 황사가 더 극성을 부리니 바깥출입을 삼가하라는 얘기가 들려왔지만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는데 병원을 나와서 바라본 도를 넘게 술을 마신 다음날이나 집단 패싸움같은 거리시위를 하고 난 후 쳐다보았던 젊은 날과 같은 노란 하늘은 여전히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살아온 날과 남은 생을 저울질 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런 날 밤 꿈에는 어김없이 형광빛 노란 안전모를 쓰고 안전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찬 광장이 멀리 보였다 가도 가도 광장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다리에 힘이 빠져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면 평생 한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노랑머리염색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일었지만 바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새어나오는 듯한 노란 비웃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눈에 무언가가 잔뜩 끼였는지 허공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산책에서 돌아와서 아침마다 입으로 털어넣는 온갖 약들 중에서 안과의사가 처방해 준 노란색 알약을 보면 왠지 기분이 나빴다 죽기 전에는 절대 실현되지 못하는 사소한 인생이여 보기도 싫고 먹기도 싫은데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요 그래요 노란꽃은 어쩌면 겨울이 제철인지도 모르고 수온주가 영상을 지나 한참 위라는데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도 왜 이리 추운가요 오늘도 겨울비가 내리려는지 내 눈에서는 노란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리고 멀미약을 먹은 듯 몽롱하게 몽롱하게 잠이 쏟아졌다